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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Mar 11. 2024

당신은 당신 자신을 보나요?

자책의 유통기한

   나는 잘 웃고 잘 울기 때문에 스스로의 감정을 잘 알고 있으며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엄마, 아빠에게는 냉담할 때가 많았다. 대학교 때, 방학이 다가오면 집에 갈 생각으로 신나 있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왜 그런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의 경우는 억지로 집에 가거나 그냥 학교에 머물렀다. 서울에서 자취를 할 때 부모님이 집에 오면 마음이 불편했고 얼른 가기를 바랐다. 부모님이 없어야 비로소 홀가분해졌다. 시골에서 김치나 반찬이 와도 한숨부터 나왔다. 


   졸업 앨범을 보면 나는 무표정하다. 앨범 속 무수한 사진에서도 표정이 없다. 그저 사진 찍는 게 어색해서 무표정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조금 이상하다 여겼던 순간이 있었다. 코미디 영화였는데 모두 웃을 때 나는 울었다. 나는 슬픈데... 사람들은 왜 웃지. 감정의 어딘가가 고장 나 있음을 막연하게 느꼈다. 하지만 그게 살아가는 데 문제 될 건 크게 없었다. 내가 타인으로부터 가장 자주 들었던 말은 “솔직하다.”였으니까. 


   어떤 자리에 있건 타인이 나를 재치 있고 유쾌한 사람으로 보는 게 좋아서 말을 많이 했다. 다행히 웃음 포인트를 잘 잡아 내서 분위기를 주도할 때가 많았다. 자리에 꼭 필요한 사람이고 싶었다. 그럴수록 불필요한 말이 많아졌고, 그만큼 피로감이 쌓였다.


  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된 건, 글쓰기 모임에서 만난 K언니의 말 때문이었다. “라니 씨는 뭘 그렇게 많이 해요? 누구나 가면을 쓰지만, 힘들어 보여요. 감추지 않아도 괜찮아요.” K언니의 말에 가슴이 후끈 달아올랐다. 들키고 싶지 않은 뭔가를 들킨 마냥 뜨끔했다.   

   

  친구 M은 나에게 말했다. “언니의 솔직한 말이 가끔은 아프기도 해요.” M은 내가 아끼는 동생이었기 때문에 그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친구를 아프게 만드는 솔직함이라는 게 무슨 소용이지. 사려 깊은 솔직함이 아니라 단지 무례했던 거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보다 다 아는 척하고 싶었던 것이다.           

  존재감을 드러내던 방식에 오류가 생겼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무엇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게 좋았다. 무엇은 다양할수록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무엇을 하지 않는 나는 봐주기 힘들었다. 끊임없이 무엇을 찾아다녔다. 열정이라기보다는 불안을 감추기 위한 가면이었다. 나를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부모님이 불편했던 것처럼 어느 순간, 나 자신이 불편해졌다. 나를 지켜보는 또 다른 나. 그는 수시로 나타나 나를 무언가 하게 만들었다. 잘하지 못하면 쓸모없는 사람 취급했다.           


  나에게 생각과 자책은 동의어였다. 생각하는 대부분의 것이 내가 잘못한 (것만 같은) 일에 대한 되새김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남 탓보다는 자책이 쉬웠기 때문이었을까. 분명, 네 잘 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친구도 있었을 텐데... 나에게는 와닿지 않았다. 


  작년, 한 해. 완전히 놓아버렸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말자. 분명 스스로를 비난하는 마음이 솟구칠 텐데 그런 나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아무것도 안 하는 나를 수용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나는 나를 싫어했다. 밀어냈다.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예상치 못했던 건, 엉망진창으로 지내는데도 엄마 아빠는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빠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딱 한 가지. 아침만 먹어 달라 했고, 엄마는 별말 없이 그저 나를 바라봐 주었다. 어느 날부터 아침이 먹어졌다. 불규칙했던 일상이 점차 리듬을 찾아갔다. 저녁 8시면 이불을 펼치고 눈을 감았다. 오랜 불면이 서서히 나아졌다. 악몽도 줄었고 편안한 잠을 자는 시간이 늘었다. 수면 리듬이 좋아지니 해가 지는 시간이 좋아졌다. 전엔 아무것도 안 하고 하루를 보낸 느낌 때문에 불안해서 하루도 편히 잘 수가 없었다. 자기 전에 뭐라도 해야 잠잘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오랜 자책 습관은 한 번에 좋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유통기한을 정했다. '자책의 유통기한'이라고 이름 붙였다. 자책이라는 감정을 부정하고 한 번에 쓰레기 통에 넣기보다는 자책하고 있음을 알고 넉넉하게 유통기한을 주었다. 그 기간 내에 자책은 다른 감정으로 변해갔다. 머물러 있지 않았다. 

  

  닫혀 있는 감정의 문을 두드려 보기 위해 마음속에만 있던 것들을 꺼내 놓고 바라보고 있다. 내가 그려 놓은 그림 보듯이 글을 쓰고 생각을 정돈한다. 걷다가 종종 멈추게 만드는 풍경과 사람들에 대해 조금 더 오래 생각해 본다. 


  내가 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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