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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Mar 10. 2024

파고드는 제4의 벽_박신양

질문의 책

  조카는 장난감으로 나를 공격하고 내가 쓰러지는 무한 반복을 좋아한다. 조카의 공격에 깜빡하고 꼿꼿하게 있으면 “고모가 안 쓰러졌어.” 울상이 되어 울컥 올라오는 눈물을 참으며 말한다. 뒤늦게라도 “으윽.”하며 쓰러져야 간신히 조카의 기분을 풀어줄 수 있다. 


  조카가 무방비 상태로 있는 나에게 훅 달려들 때가 있다. 급습도 공격의 일종이다. 가슴이며, 옆구리 가리지 않고 마구 파고든다. 조카가 머리를 들이밀며 나를 뚫어낼 듯 파고드는데 재빠르게 쓰러지지 못했다. 조카의 파고듦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순간 잊어버렸다. 

  

  “엄마, 엄마, 고모가 안 쓰러졌어.” 

  

  조카는 내 가슴 쪽으로 파고들다 파고들다 더 이상 파고들기를 포기하고 울기 직전인 상태로 쪼르륵 달려가 엄마에게 이른다. 나는 뒤늦게 널브러져 가슴 쪽 감각에 집중한다. 조카가 공격을 멈추었는데도 깊숙이 새겨진 듯한 이 생경한 느낌은 뭐지. 잊고 있던 단어가 떠올랐다. 오래전 내 사전에서 사라진 단어를 길어 올렸다. 

  

  *파고들다 : 동사 1. 깊숙이 안으로 들어가다. 2. 깊이 스며들다. 3. 비집고 들어가 발을 붙이다.

  

  대충, 빨리 넘어가고 싶은 마음만 남아서 책도 대충 빨리 읽고 반납. 대충 빨리 결정. 대충 빨리 말하기, 대충 빨리 준비. 대충 빨리 설거지. 대충, 빨리는 한 팀이 되어 내 일상에 착 붙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 나에게 파고들고 있는 책 한 권이 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이미 반납하고 새로운 책을 시작했을 것이다. 끝까지 읽기는 했으니까. 하지만 다 읽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어느 부분이던 펼쳐서 시작하면 자꾸만 파고들어서 대충 빨리 책장을 넘길 수가 없다. 무방비 상태로 머물게 된다. 머문 자리에는 질문이 피어난다.   


  박신양의 '제4의 벽'은 나에게 파고든다. 접점과 질문이 있다. 제4의 벽은 질문이 담긴 책이면서 질문으로 지어진 집이면서 질문이 만남으로 연결될 수 있는 통로이다. 그의 책을 읽으며 '접점'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것은 나의 관심사 '동굴벽화'와 '피나 바우쉬'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져 있어서였다. 


  대충 빨리인 나도 '동굴벽화'와 '피나 바우쉬'에 관해서는 내 수준에서 파고들어 본 기억이 있다.  '피나 바우쉬' 이름을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인다. 꽃이 피어나고,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이름. 춤을 춘다. 깊은 눈, 검은 머리, 마른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의 에너지에 압도된다. 아름다운 얼굴과 몸. 색을 다 뺀 흑백의 모습이 단단하고 강렬하다. 


  피나는 감정이 자신에게 하는 말에 귀 기울였다. (89P)

  질문이란 한 주제를 아주 조심스럽게 건드리라고 있는 거라고 했다. (97P)

-피나바우쉬:끝나지 않을 몸짓, 마리온마이어, 을유문화사 

  

  중요한 건 질문 자체이며 그 질문을 대하는 그 사람 자체이다. 누구에게 어울리건 어울리지 않건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또한 얼마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대로 된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고 거기에 충분한 답변을 찾기 위해서 우선은 질문이 고스란히 유지되어야 한다. 

-제4의 벽, 박신양, 229, 민음사 

  

  '제4의 벽'에도 박신양의 질문이 끊임없이 나온다. 그의 그림과 글은 어쩌면 보이지 않는 질문을 표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가장 두려운 것 중 하나는 처음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처음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초초함까지도 포함한 단어니까. 정리는 그런 면에서 처음과 비슷한 면이 있다. 정리를 시작하려고 하면 일단 겁부터 난다. 그의 책에 나오는 질문들을 정리해두고 싶다. 엄두가 나지 않지만 처음으로 돌아가서 차근차근하다 보면 내 나름의 정리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깊은 의미'는 아주 처음으로 돌아가서 차근차근 다시 생각하기에 찾아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4의 벽, 박신양, 113, 민음사 


  파고들기는 한 방이 아니다. 한 방울 한 방울이다. 파고들기는 어떤 접점을 만나는 것이며, 가까워지는 길이기도 하다. 조카의 파고들기 공격을 받으면 으윽, 으윽 지는 척하면서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쓰러질 것이다. 오늘밤에도 '제4의 벽'을 만나 질문 속으로 파고들기 해 볼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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