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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Mar 08. 2024

온 그녀들

페일_feulle

  힘든 순간마다 내게 손 내밀어 준 이는 여자들이었다. 그녀들은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내민 손에는 무언가 있었고, 그것을 나에게 건네는 방식으로 왔다. (이건 쓰면서 알게 되었다) 나에게 무언가 주었다. 무언가는 빵, 돌, 책, 솜 같은 사물이기도 했고, 음악이나 언어, 말투 같은 것이기도 했다. 나는 그녀들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그녀들은 나의 말투며 몸짓에 고스란히 살아있다. 그녀들은 불현듯 선명해지고, 아무렇지 않게 사라졌다가도 잿더미 속의 불씨처럼 살아난다. 나의 내부와 외부 혹은 경계 지을 수 없는 어딘가에서 그녀들의 스침을 찾아내는 것이 나의 할 일로 여겨졌다. 누가 보기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야기의 조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조각조각을 열심히 주워 모아볼 생각이다. 어떤 그림이 만들어질지 모르는 퍼즐판과 조각들의 자리를 찾아주는 것처럼. 혹은 풀릴지 안 풀릴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수수께끼를 간직하면서 풀어보는 방식으로. 

  

  쓰기로 결심하지 않고 쓰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을 지나 온 셈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들은 와주었고 함께 해 주었다. 나에게, 그녀들은 어떤 암시처럼 다가왔고, 그녀들을 만나기 전과는 조금은 다른 삶으로 스몄다. 변화가 일어났는데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조차도 눈치채지 못했다. 쓰는 동안 아마도 그녀들은 내게 말 걸어 줄 것이다. 아무리 강렬한 꿈도 시간이 지나면 멀어지고 희미해진다. 하지만 내게 온 그녀들은 사라지지는 않는다. 미미하더라도 남아 있고, 그것이 새롭게 다른 구석으로 이끌기도 한다. 


   지금부터 그녀들을 데려와 프랑스 단어로 된 이름을 붙여줄 것이다. 아직 내게는 이름이 없다. 그녀들의 이름을 모으다 보면 나의 프랑스식 이름도 생기지 않을까. 그녀들과 함께 낯선 프랑스어 단어를 하나 하나 알아가고 싶다. 

 


 feulle 페일 : 나뭇잎_음악기타부스스한 머리 


   페일이 웃는 게 좋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웃기고 싶다.


  페일은 햇살이 좋은 날이면, 밖에 의자를 내놓고 기타를 쳤다. 페일만의 오롯한 시간. 부드러운 기타 선율, 조용한 그녀의 읊조림이 어우러지면 둘레가 평온해졌다. 나는 페일 주변을 맴돌았다. 방해하고 싶지는 않은데, 속해 있고 싶었다. 그녀는 한 두곡 정도를 반복해서 연주했다. 지루하거나 지겹지 않았다. 아주 바쁠 때를 제외하고는 기타를 잡았다. 외부 촬영 미팅으로 페일이 사무실에 없으면, 나는 멍하니 기타를 바라보곤 했다. 페일이 얼른 돌아와서 기타를 쳐 주면 좋겠다고 바랐다. 페일과 친해진 후에는 내가 밖에 의자를 내놓고 페일에게 기타를 떠 안겼다. 


  페일과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났다. 인도 여행 이후, 재미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아이들과 영화를 만드는 작은 회사에 들어갔다. 나는 주로 기획 일을 했고, 페일은 영상을 찍고 편집하는 일을 했다. 카메라 앞에서 사람들은 보통 어색해지거나 굳기 마련인데 페일이 카메를 들고 있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찍히고 인터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분위기에 자연스레 스며든 달까. 그래서 그녀의 영상 속 사람들은 자연스럽고, 자유분방했다. 페일은 사라졌다 나타나고 또 사라졌다 나타나는. 희귀한 존재감을 가졌다. 


  페일은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에 직접 찍은 영상을 입히는 걸 좋아했다. 흑백의 화면, 전깃줄에 앉아있는 비둘기 한 마리. 영상 시작부터 끝까지 변화 없는 장면. 정지 화면 같은 단조로운 배경 속에 멜로디만 흘렀다. 보다 보면 지루해질 법도 한데 이상하게 슬프면서도 평온해졌다. 


 새카맣고, 숱 많은 부스스한 머리털. 페일은 곱슬머리였는데, 머리를 펴기 위해 미용실에 다니지 않았다. 첨엔 이상했다. 관리되지 않은 그녀의 머리가 낯설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럽고 개성 있게 보였다. 심지어 또래들의 매끈하고 찰랑거리는 머리털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었다. 보통은 심플한 검정 외투, 톤 다운된 에스닉한 머플러를 두르고 다녔다.


  나는 그녀의 스타일을 보고 인도에 다녀왔을 거라고 단정했다. 그녀는 내가 인도 이야기를 해주는 것을 좋아했다. 자신도 꼭 가보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함께 있으면 시공간이 바뀌었다. 그녀에게 다람살라와 맥그로드간즈를 추천했고 두부버거를 꼭 먹으라고 했다. 다람살라의 승려들이 정말 잘생겼다고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그녀는 내 이야기에 무조건 웃었다. 얼굴 표정은 크게 웃고 있어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처음엔 저런 웃음이 있나 싶었는데, 나중에는 그 웃음도 좋아졌다. 얼굴이 아니라 탈 같았다.


   사람은 동물이다. 그녀를 만난 후 일반적인 관념이 흔들렸다. 웃을 때 수줍은 듯 손으로 입을 가리고, 조용조용 걸었다. 상상했다. 그녀의 집을. 인가와 떨어진 숲 속. 온갖 덩굴식물로 문의 입구가 둘러싸여 외부인은 집의 문부터도 찾기 힘든 곳. 여름의 초록의 나뭇잎이라기보다 가을의 부스럭대는 낙엽에 가까운. 식물. 식물 같은 사람. 나무껍질. 무심결에 건드리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나약함이 오히려 그녀를 지켜내고 있는 듯했다. 


  내가 최초로 만난 비건이기도 했다. 고기를 굽는 회식자리에서 그녀를 위해 된장찌개를 시켰으나, 차돌 된장이 나와서 거의 밥만 오물오물 먹던 페일이 한 번씩 떠오른다. 그녀를 만나면 메뉴는 거의 같았다. 떡볶이. 비건인 그녀가 그나마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게 떡볶이였다. 


  페일을 만나면 표정 없던 얼굴이 나로 인해 환하게 펼쳐지는 게 좋았다. 페일은 특히 내가 사람들 걸음걸이를 흉내 내는 걸 좋아했다. 페일의 웃음 덕분에 나는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열심히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다. 걸으면서 만들어내는 특유의 리듬을 포착하고 살짝 과장하는 게 포인트였다. 


   한마디로 걸음걸이의 캐리커쳐. 생각보다 걸음걸이에는 많은 것이 담겨있음을 알았다. 말하지 않아도 보이는 것 중 하나가 걸음걸이였다. 페일이 가장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던 사람은 3년 만났던 남자친구였다. 그의 걸음걸이는 춤에 가까웠다. 땅을 밟고 걷는 다기 보다, 폭신한 매트리스 위를 걷는 것처럼 사뿐사뿐하면서도 경쾌했다. 보고 있으면 들뜨면서도 묘하게 우스꽝스러웠다. 


   페일은 함께 걷다가 불쑥 전 남자 친구의 걸음걸이를 보여 달라고 아주 쓸쓸한 표정으로 주문했다. 웃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손뼉까지 치면서 웃었다. 페일의 웃음은 음소거가 된 장면과 흡사했다. 꽃도 그렇게 피지 않나. 소리 없이 활짝 웃으면서. 나는 요란스럽고 숨을 할딱할딱이며 호들갑스러운 웃음소리. 페일은 꽃처럼 소리 없이도 활짝 웃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우리는 그의 덩실대는 걸음걸이 덕분에 급속도로 가까워졌을 것이다. 

  

  나는 일을 그만두었고, 페일은 1년 정도 더 다녔다. 그 후 그녀는 영상과 인디밴드공연 함께 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했으며, 그녀의 초대로 공연장에 갔었다. 그녀가 감독으로 소개되고, 무대에서 수줍은 듯 웃으며 인사하며 휙 사라지는 모습에서 잘 살고 있구나. 곧 인도로 가겠구나 싶었다. 그녀는 실제로 인도 다람살라에 다녀왔고, 거라고 했다. 두부버거를 먹었는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그로부터 몇 년 지나도록 우리는 만나지 못했고, 페일에게서 가끔 메일이 왔다. 음악이나 영화 파일이 첨부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또 몇몇 년이 지났다. 늦은 밤, 전화가 걸려왔다. 반가운 마음도 내지 못할 만큼, 페일은 끄억끄억 울먹이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주체 못 할 슬픔이 넘쳤다. 페일의 가까운 이가 죽은 줄 알았다. 큰일이 났구나. 상황의 조합이 시급했다. 정리해 보니,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했고, 그 상대는 페일을 거절한 모양이었다. 저렇게 울만큼 큰일인가. 공감하지 못했다. "언니, 어떡해요. 어떡해요." 울며 묻는 내게 "울지 마. 울지 마."라고 밖에 말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 페일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페일의 부스스한 새까만 머리. 이제 몇몇 가닥은 희어졌을까. 왠지 그대로 있을 것만 같다. 언젠가부터 미용실에서 머리는 자르지만 스트레이트 펌을 하지 않는다. 부스스한 채로 있는다. 나에게도 기타가 있다. 딱 두 곡 밖에 못 치지만 칠 때마다 몰두하게 된다. 


  한밤중에 나는 왜 옛날 남자친구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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