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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Mar 07. 2024

뭐라도 드셨어요

밥심 

  아침에 부엌에 나가보니 달래와 냉이가 한 소쿠리 넘치게 있었다. 다행히 아빠가 꼼꼼하게 다 씻어두었다. 고추장, 간장, 참깨, 들기름, 설탕, 식초를 넣어서 달래를 무쳤다. 빨강 파프리카가 보이길래 얇게 썰어 넣었다. 무친 뒤 먹어보니 좀 맵다. 사과를 적당한 두께로 썰어 추가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봄나물이 좀 지긋했다. 해 놔도 맛있는 줄도 잘 모르겠고, 아침마다 무쳐야 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나물 무치기 싫어서 꾀병을 부리기도 했다.   


 꾀병 


내가 무친 시금치를 먹으면 아팠다

내가 끓인 쑥국을 먹으면 아팠다

내가 구운 고등어를 먹으면 아팠다


소쿠리 가득 넘쳐 나는 냉이를 봤다 

내일 아침 냉이를 무쳐야 한다

봄이 오면 무쳐야 할 것이 넘쳐난다 

숨 죽지 않은 채로 오는 무성함이 지겹다 


내일 아침에 아프면 

냉이 무침 못할 거야


 아픈 엄마에게는 

가짜 딸이 하나 있다 


아픈 엄마는 몸을 일으키고 냉이를 데친다 

가짜 딸은 숨죽이고 꾀병을 진행시킨다


아픈 엄마의 기침 다섯 방울, 한숨 세 큰 술,

시퍼런 손의 냉기로 냉이는 차게 차게 무쳐진다 


엄마는 냉이무침이 짜다고 했지만 

가짜 딸은 입맛이 돌았다


냉이 뿌리를 잘근잘근 

오래 씹으면 씹을수록 

진짜 딸이 되어간다 


  이랬는데 올해 봄나물은 좀 다르다. 봄을 지나온 모양이 대견하니 이쁘장하다. 봄나물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나는 나를 곧잘 오해한다. 친척들이 집에 오면 인상이 찌푸려져서 사람들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 안 씻고 있어서 꾀죄죄할 때 사람들을 대면하는 게 싫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반복하는 일들이 내게는 늘 귀찮고 버거웠다. 예를 들면, 씻기와 먹기. 그런데 요즘은 남자 친구가 없어도, 출근이 없어도, 약속이 없어도 잘 씻는다. 시간 맞춰 아침, 점심, 저녁도 먹고 있다. 전에는 밥때를 건너뛰고 싶었던 적이 많았다. 밥 때 되면 착착 뭐라도 챙겨 먹는 이들이 신기했다. 일상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것들이 잘 되지 않았다. 들쑥날쑥했다. 어떤 때는 잘 씻다가도, 잘 챙겨 먹다가도 어떤 때는 완전히 손을 놓아버렸다.  


  엄마 아빠랑 살면서 제 때 세끼를 먹어야 하는 것이 힘들었다. 특히 아빠는 한 끼라도 안 먹으면 큰일 나는 줄 안다. “밥 안 먹는 사람 제일 미워. 제일 미워. 미워.” 토라져서는 내 얼굴을 볼 때마다 잔소리를 한다. 아빠의 토라짐 때문일까. 이제는 하루 세끼를 잘 먹고 있다. 어떤 날 점심은 간단하게 케이크나 빵, 고구마를 먹기도 한다. 아예 아무것도 안 먹고 지나가는 일은 거의 없다.   


  울다가도 먹고, 우울하다가도 먹고, 속상하다가도 먹고, 졸려도 먹고, 먹기 싫어도 먹고, 귀찮아도 먹고, 배 부르면 조금만 먹고, 반찬 없어도 먹고, 감기 걸려도 먹고, 일어나기 싫어도 일어나서 먹었다. 계속 먹다 보니 먹게 되었다. 

  

  밥심. 

  문득, 내 일상이 밥때를 중심으로 지탱되고 있음을 알았다. 밥이 주는 힘을 받고 있다. 나를 잘 씻기고 제 때 먹이는 일을 해낸다.  혹시, 힘이 나지 않는다면 밥을 잘 챙겨 먹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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