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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Apr 05. 2024

라니의 돌

켄 리우, <상태 변화>를 읽은 뒤 짧은 상상 

라니의 돌


  라니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간직하고 있던 돌 하나가 있다. 엄마는 그 돌이 너의 영혼이라고 말하며 잃어버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라니는 영혼이라는 말을 몰랐지만 애착인형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투명한 옥빛 돌. 맑은 바닷물을 품은 돌은 빛에 따라 다르게 보여서 돌만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돌은 흙바닥에도 시멘트 바닥에도 심지어 철판에도 부드럽게 잘 그어졌다. 그림도 그리고 땅따먹기도 하고 숫자도 쓰면서 돌을 가지고 놀았다. 돌이 있으면 친구들 없어도 혼자 놀 수 있었다. 잃어버릴까 봐 조심했다. 쓰고 나면 손에 꼭 쥐고 있거나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어른이 되어도 돌은 라니와 함께였다. 다만, 작은 상자 안에 넣어두었다. 20~30대에는 연애와 일을 하느라 돌을 아예 잊고 정신없이 살기도 했다. 한 번씩 생각나서 돌을 꺼내보면 돌이 점점 닳고 작아져 있는 것 같았다. 옥빛도 탁하고 흐릿해 보였다. 그것이 단지 느낌인지 아니면 실제인지 애매했다.  


  라니는 단단하고 둥근돌 같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나이가 들자 자신의 얼굴에서 얼핏 엄마가 보이는 듯도 했다. 엄마는 단단한 사람이었지만 무슨 모양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라니는 엄마의 영혼이 궁금했다. 다른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의 영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라니는 알지 못했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물어보면 엄마가 어디론가 떠날 것만 같았다. 엄마는 자신의 영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친구들에게는 엄마의 영혼이 아주 예쁜 꽃이라고 말했다. 

  

  엄마는 작년에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른 뒤 유품을 정리하는데 장롱 서랍 구석에서 고이 접힌 빛바랜 손수건 한 장이 나왔다. 손수건 안에 무언가가 만져졌다. 라니는 직감적으로 엄마의 영혼일 거라고 생각했다. 펼쳐보기 망설여졌다. 


   괜찮아. 어쩌면 엄마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말일지도 모르잖아.   


  엄마의 영혼은 머리가 붉은 성냥개비였다. 작은 컵에 성냥개비를 한동안 꽂아두었다. 꽃처럼. 붉은 성냥개비의 머리가 활짝 피어나는 상상을 했다. 아무 소용없는 짓이었지만, 엄마의 영혼을 그렇게 바라보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성냥개비는 돌아가시기 전 엄마의 가녀린 손을 연상시켰다. 


   돌이 어느 날 갑자기 엄마처럼 사라지면 어떡하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른이 되었으니 돌이 상대적으로 작게 느껴지는 걸 거야. 라니는 상자 안에 돌을 넣으려다 들고나갔다. 어둑한 밤이라 놀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요즘은 낮의 놀이터에도 아이들을 볼 수가 없다. 노인들만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낼 뿐이다. 미끄럼틀이나 그네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것들을 바라보는데 쓸쓸한 영혼 같은 느낌도 들었다. 

   

  아직도 바닥에 그려질까. 라니의 돌은 광택 있는 반짝이는 선을 그릴 수 있었다. 돌을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가로등 불빛이 비추는 곳으로 갔다. 그런데, 무얼 그리지. 무얼 쓰지. 생각하느라 돌만 둥글리고 있었다. 쪼그려 앉았더니 다리가 저려왔다. 문득, 라니는 이제 돌이 자신에게 필요 없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이터의 미끄럼틀이나 그네처럼. 그저 유년의 돌일 뿐이었다. 갑자기 가로등의 불빛이 꺼졌다. 

  

  라니는 온 힘을 다해 힘껏 돌을 던졌다. 사실, 라니는 늘 돌을 던지고 싶었다. 아주 멀리까지. 어디까지 돌이 날아갈 수 있는지 보고 싶었다. 손에 쥐고 있으면 던지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사실, 던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채 그림을 그리고, 글자를 쓰면서 놀았다.  

  

  돌이 통통 튀었다. 돌의 내부에서는 불빛도 나왔다. 눈을 의심했다. 돌이 저렇게까지 가볍게 튀어 오르다니. 돌이 튀어가는 방향을 쫓아갔다. 돌은 멈추지 않고 마치 신난다는 듯 더욱 높이 팡팡 튀어 올랐다. 라니도 속도를 내야 했다. 다행히 돌에서 빛이 나와 돌이 가는 방향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돌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고 양손을 오므렸다. 쉬이 잡히지 않았다. 돌은 미끄럼틀 계단 위로 붕 튀었다. 라니는 돌 보다 더 빨리 가려고 계단이 아니라 은빛으로 반짝이는 미끄럼틀로 기어올랐다. 신기할 정도로 몸이 가뿐했다. 

  

  라니가 헉헉 거리면, 돌이 속도를 늦추었다. 라니는 “야~“ 돌을 쫒으며 마치 친구처럼 말을 걸기도 했다. 불현듯 라니는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영혼이 돌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짝이는 공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기대해도 될까.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처럼 자유롭고 가볍게. 


  문득, 엄마의 영혼인 성냥개비가 궁금했다. 라니는 컵에 꽂아 두었던 엄마의 성냥개비를 손에 쥐었다. 종이에 쓰윽 붉은 머리를 그어보았다. 부드럽게 붉은 선 하나가 그어졌다. 이 냄새는... 엄마가 화장을 하면 얼굴에서 나던 냄새였다. 


  엄마의 영혼은 성냥개비가 아니라 붉은 립스틱이었다. 라니는 붉은 립스틱을 발랐다. 엄마의 영혼 가득한 사랑의 울림. 엄마는 자신의 영혼을 아꼈다. 라니에게 나눠줄 만큼. 남겨둘 만큼. 엄마는 사라진 게 아니라 라니에게서 나타났다. 또렷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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