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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Jun 28. 2024

수수 몽땅 빗자루


  팀 잉골드의 '조응'을 읽어 나가는 중이다. 손글씨로 종이에 글쓰기(이하 손글)를 마친 뒤 노트북 워드패드를 펼쳤다. 조응 효과. 물론 '조응'을 읽기 전에도 다이어리를 쓰거나 친구에게 엽서나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낼 때 펜을 잡았다. 책 속에 나오는 글귀를 옮겨 적을 때도 노트와 펜을 썼다. 기분에 따라 연필, 볼펜, 만년필 등 필기구를 골랐다. 종이에 맞춤인 펜을 만나는 경우에는 제 짝을 이어준 마냥 뿌듯했다.   


  손글은 좋음에도 종이가 쌓이고 노트가 쌓이는 게 부담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바로 워드로 두드릴 때보다 밀도 높고, 살아 있는 글이 써졌다. 예상치 못한 흐름과 맥락이 생겨나기도 했다. 타자로 치는 글은 생각을 정리하고 구성하는 것에 가깝다면, 손 글은 샛길로 빠지다가도 돌고 돌아 쓰고 싶은 줄도 몰랐으나 쓰고 싶었던 무언가가 생성되어 나왔다. 나도 모르게 어쩌면 나와 무관하게 오로지 손과 펜이 손 잡고 글(길) 위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워드패드 글은 내가 쓰고자 하는 방향으로 직진하라고 지체 없이 등 떠미는 움직임 직선에 가까웠다. 마침표를 찍으면 말 그대로 글이 끝났지만, 손글은 구불구불 굽이 쳐 글이 끝났음에도 어디선가 뭔가 다시 시작할 기미를 풍겼다. 

  

  부름에 대한 응답의 반응이었을까. 

  돌을 줍고, 나뭇가지를 모아 그리고, 낙엽들을 오래 바라보고 굴러가는 소리에도 귀가 열리고, 꽃 앞에서 자주 멈추던 나의 모든 움직임들이...   

  

  나무의 수피는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도 풀 수 없는 암호. 수수께끼였다. 하다 하다 못해 나무껍질까지 날 멈추게 하는구나. 내가 수피에게 다가가 말 걸고 있는 줄 알았는데 혹시 그 반대는 아니었을까. 나무가  나에게 먼저 "같이 놀자." 말 걸면서 내가 호기심을 가질 만한 자신들의 몸통 수피 문양을 보인 것은 아니었을까. 

  

  팀 잉골드의 '조응'을 읽으며 그간 나조차도 해석되지 않았던 기이하고 자잘 자잘한 움직임이 그들 (돌, 나뭇가지, 나무, 꽃 등)에게 보내는 일종의 답장, 즉 조응이었다는 걸 확인했다. 반갑게 만나진다. '조응' 멀고도 먼, 단어였는데 가까워지는 중이다. 더 깊이 들어가고 싶다. 주의를 기울이고 귀를 좀 더 열고 싶다. 

  

  나무, 새, 꽃들에게 내가 관심과 호기심을 보이고 있다고만 생각했지 그들이 나를 부르고,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모호한 움직임으로 응답, 조응하고 있었다. 나만 있었는데, 이제 그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쁨이 솟는다. 분수 모양으로 자란 나무처럼. 

  

  불현듯 할 일이 생각났다. 

  밖으로 나가 아빠가 손수 만든 몽땅한 수수 빗자루를 찾아다녔다. 얄풋한 대나무 잔가지로 만든 키 큰 빗자루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대비는 마당을 크게 크게 쓸 때 사용한다. 제각각인 대나무 잔가지로 만들어진 빗자루를 다시 본다. 

  

  내가 지금껏 봐 온 아빠의 이미지와 다른 빗자루의 생김새다. 아빠는 솜씨가 없어서 대충, 엉성한 만듦새를 가졌을 것 같은데... 가지가지 얽어 묶어 놓은 것을 보니 제법 꼼꼼하다. 대비를 대추나무 아래 세우고 포장된 선물과 흡사한 감나무 열매를 빗자루 사이사이에 끼워 넣었다. 감나무, 대추나무, 대나무의 콜라보로 세 나무들이 조우했다. 즉흥적으로 벌인 오늘 나만의 놀이다. 

  

  찾았다! 

  수수 몽땅 빗자루.

  

  조카 이준이가 작년 추석, 처음으로 놀러 온 날, 대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고 제일 먼저 손에 잡은 것이 이 몽땅한 수수 빗자루다. 마당을 돌아다니며 들고 다녔다. 그때보다 길이가 더 줄어든 것 같다. 이준이는 쑥쑥 자라고 있는데, 이 빗자루는 점점 더 몽땅해진다. 앞으로 얼마나 더 쓸 수 있을까. 다행히 아직까지 잘 쓸린다. 플라스틱 재질로 된 알록달록한 빗자루가 있지만, 잘 쓸리지도 않고 바닥을 쓰는 재미가 영 없다. 몽땅한 수수 빗자루는 손에도 바닥에도 착착 감긴다. 마치, 바닥의 사정에 맞춰서 닳고 닳아 지금에 이른 것 같다.     

  

  귀하게 여겨진다. 수수 빗자루, 대나무 빗자루. 빗자루 두 자루가 새롭게 다시 보인다. 빗자루로 바닥을 쓰는 일은 이제 나무와 접촉하고 나무의 손을 잡는 것이 된다. 

  

  아빠는 밭에다 수수를 심고 거둔 뒤 그 가지를 엮어 빗자루를 만들었다. 막걸리 한 병하고 빗자루 한 자루를 바꾸기도 했다. (밑지는 물물교환 같음) 아빠가 손수 만든 빗자루로 바닥을 쓴다는 건, 아빠의 손을 잡는 일이 된다. 바닥이 자꾸 쓸고 싶다. 


  가정에서는 잔가지들의 한쪽 끌을 한데 묶거나 막대기에 매달아 고르지 않은 표면과 바닥을 쓰는 데 안성맞춤인 솔과 빗자루로 만들었다. 이런 도구들의 형태는 얽힌 잔가지의 탄력성과 마찰력으로 유지된다. (...) 잔가지의 형태는 하나하나 다르다. 모든 잔가지는 고유하다. 하지만, 그것들이 모이면, 누군가에게는 거처가 될 수 있다. 


-조응, 팀 잉골드, 86-8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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