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림책 자판기_02

큰 늑대 작은 늑대

by 고라니

다가가고 싶은 친구와 보고 싶은 그림책

큰 늑대 작은 늑대 /올리비에 탈레크 그림. 나딘 브룅코슴 글/ 이주희 옮김/시공주니어


내 경우 글 없는 그림책보다는 글 있는 그림책이 좋다. 단순한 이유로. 글과 그림을 함께 보는 게 좋아서. 그림책 속 글이 빼곡하다면 보기 힘들다. (소설이나 에세이는 괜찮은데...) 그림이 만화처럼 조각조각 나뉜 구성도 따라가는 데 피로감이 든다. 정신없다.


'큰 늑대 작은 늑대' 글이 적당하고 그림이 시원시원하다. 마냥 좋은 데 쓰려니 해골이 복잡해져서 질끔찔끔 썼다. (쇼펜아우어 아포리즘을 재미나게 읽느라 쓰기는 뒷전이었다.)


우정, 하면 생각나는 그림책들. 줄줄이 나온다. 큰 늑대 작은 늑대, 새가 된 날, 마귀와 뚜기, 걷는 사이, 오틸라와 해골 등...(더 있을 텐데...)


왼쪽 무릎이 좀 욱신거릴 때면, 오른쪽 다리에 힘을 싣는다. 오른쪽 어깨가 결리면 왼쪽 팔을 좀 더 움직인다. 그러다 보면 다시 회복된다. 다행히도 아직 함께다. 이런 순간 우정을 느낀다.


우정은 두 개의 영혼을 지니고 있다. 우정을 가진 자는 두 개의 영혼을 가진 자다. 한 영혼이 쓰러지더라도 곁에 있는 또 다른 영혼이 그를 일으켜 세운다. 어떤 경우에도 둘이 함께 쓰러지는 법은 없다. 삶이 인간에게 우정을 선물한 까닭이다. (91P)


-쇼펜하우어 아포리즘_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 김욱 편역 / 포레스트북스


대부분의 그림책에는 우정이 들어있다. 그래서 그림책을 계속 찾게 된다. 우정을 발견하고 되새기기 위해. 자칫하다가 우정을 까먹게 될까 봐. 뒷전이 될까 봐.


우정을 생각하면 사랑도 덩달아 뒤따라온다. 우정과 사랑. 한 때는 구분 짓고 싶었다. 사랑이 뭔지. 우정이 뭔지. 국어사전에 나오는 정의가 아니라 내 나름의 정의를 갖고 싶었다. 정체를 밝혀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구분과 정의에 얽매이느라 시간을 쓰고 싶지 않다. 차라리 친구에게 띄울 엽서를 고르겠다.


우정을 보여주는 아주 새초롬한 그림책 '큰 늑대 작은 늑대' 글과 그림이 찰떡이고 극진히 사랑스럽다. 커다란 판형의 그림책. '큰 늑대'는 크게 그릴 수 있고, '작은 늑대'는 상대적으로 작게 표현되어 둘의 대비를 보여주기에 좋다.


오랫동안, 혼자 살아온 큰 늑대. 어느 날 작은 늑대가 나타난다. 큰 늑대는 작은 늑대가 자신보다 더 클까 봐, 나무를 잘 탈까 봐 비교하고, 경계하는 마음을 갖는다. 그러면서도 밤이 되자, 큰 늑대는 작은 늑대 쪽으로 나뭇잎 이불 끝을 밀어주고 아침에는 열매 몇 개를 밀어주기도 한다. 큰 늑대는 작은 늑대와 함께 있는 게 어색하지만 작은 늑대에게 자꾸만 마음이 쓰이고 눈길이 간다.


잠시, 나의 사귐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어색한 채로 있지 못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쏟아내고, 예의 없는 행동을 남발하던 나. 좀 더 친해지고 싶은 이가 있어도 만나면 불편할까 봐 약속을 먼저 제안하지 않는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 가면서 어색함과 그런대로 잘 지내는 듯싶었으나 조카가 태어나면서 원점으로 돌아갔다.


아이들과는 스스럼없이 잘 지내는 편인데 조카와는 좀 어렵다. 조카 앞에서 유독 쭈뼛대고 할 말도 바로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 그럴듯한 말하기는 접어 두고 큰 늑대의 마음 씀을 따라 하자. 조카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쓱 밀어주고, 포도 젤리를 손에 쥐여 주자.


산책을 나간 큰 늑대는 숲으로 들어가면서도 나무 아래 작은 늑대가 있는지 자꾸 뒤돌아 본다. "이제는 너무 작아져서 큰 늑대가 아니면 거기에 아주 작은 늑대가 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산책에서 돌아온 늑대는 작은 늑대가 보이지 않자 불안한 마음을 안고 허겁지겁 나무 밑으로 달려간다. 아무도 없다. 큰 늑대는 처음으로 저녁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기다린다. 큰 늑대는 작은 늑대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별별 생각을 다 한다. 나뭇잎 이불을 훨씬 더 많이, 열매도 더 많이... 줄 거라고 작은 늑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자기 것부터 먼저 챙기고, 자신보다 몸집이 크면 어쩌지. 운동을 잘하면 어쩌지. 불안해하던 큰 늑대가 달라졌다. 작은 늑대가 없는 시간을 홀로 보내며 큰 늑대는 변해간다.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늑대가 돌아온다.


"멀리 작은 점이 보였습니다.

너무 작아서 큰 늑대가 아니면,

또 그렇게 기다리지 않았으면,

누가 다가오는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큰 늑대가 아니면, 작은 늑대가 거기 있는 줄 모르고, 큰 늑대가 아니면, 누가 다가오는 줄도 몰랐을 거라니. 큰 늑대의 간절한 마음이 와닿는다. 큰 늑대 작은 늑대는 그렇게 서로에게 유일무이한 관계가 된다.


친구라도, 친구여서 어쩔 수 없이 비교되는 순간이 있다. 친구에게 질투나 경쟁심이 드는 건 괴롭다. 마치 친구 없는 자리에서 뒷담화를 한 후, 후회하는 심정 같달까. 친구에게 생겨나는 질투나 경쟁심을 인정하고, 기다려주면 새로운 관계의 장이 열리기도 한다. 못난 마음에 가려진 장막이 걷히고, 친구를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이 드러난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것처럼 '두 개의 영혼을 지니게 된다.' 외롭지 않고 의지가 된다.


사랑의 표현은 기다림이다. 기다림은 그 고통을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리다가 지쳐 거리를 헤매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황무지 같은 들판을 찾아가 자학하듯 울음을 터뜨리고, 스스로 양심을 무너뜨리고, 또다시 기다리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픔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 사랑은 고통과 기다림에 대한 인내다. (p86)

-쇼펜하우어 아포리즘_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 김욱 편역 / 포레스트북스/


헤어지자고 말했을 때, 그는 이유를 묻는 대신 덤덤한 목소리로 딱 한 마디 했다.

"기다릴게. 언제든 연락해."

당시는 그의 반응에 어리둥절했다. 완전히 헤어진 기분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도 그 후로 서로에게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가만 생각해 보니 하루가 온통 기다림으로 채워진다.

잠이 들기를. 기침이 멈추기를. 몸을 일으키기를. 야채가 적당히 익기를. 밥이 다 되기를. 바람이 불기를

땀이 식기를.


기다림은 시작을 품은 기도.


6007936.jpg

(사진 출처 : https://www.yes24.com/Product/Goods/2828797)

keyword
작가의 이전글식물 그리는 목요일_24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