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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자판기_06

바람의 우아니

by 고라니

침묵과 바람의 그림책

바람의 우아니 / 비올렌 르루아 글.그림 / 이경혜 옮김/곰곰


이렇게 그릴 수 있다면...

이렇게 쓸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내가 아니겠지.

'바람의 우아니'는 어릴 적 들었던 사라진 산꼭대기의 신비로운 마을을 찾아가는 여정과 그 길에서 만난 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겪은 이야기다.


우연히 빌리게 된 이 책을 몇 날 며칠 품었다. 만약 내가 새였다면, 알이었던 책은 새로 부화했을 것이다. 광활한 설산의 풍경에 압도당했다. 나오는 이들의 볼 빨간 귀여움과 무구함에 혼탁했던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듯했다.


겨울이 좋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매서운 겨울바람은 쉴 새 없이 새어 나오는 생각을 꽁꽁 얼려버린다. 오직 춥다는 감각만 살려 놓는다. 눈이 많이 오는 강원도 태백에서 나고 자랐다. 유년, 겨울에는 눈 속에 파묻혀 지냈다. 지긋지긋할 법도 한데 와도 와도 또 눈이 오면 감탄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첫 순간은 늘 마법 같았다. 다른 사람의 발자국에 내 발자국을 포개며 누군가의 발 크기를 상상해보기도 하고 아무 흔적 없는 깨끗한 눈길에 처음으로 발자국 길을 내는 것도 재미있었다.


모험과 여행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본다. 주인공 '나'가 사라진 마을을 찾아 떠나는 길을 '여행' 보다는 '모험'이라고 부르는 게 적절하겠다. '나'는 눈보라, 칼바람 고난과 위험을 무릅쓰고 사라진 산꼭대기의 신비로운 마을을 향해 간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돌 하나가 굴러온다. 이어 낯선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말없이 웃는 그들을 따라간다.


"그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내내 지켜본 게 분명했다.

하얀 눈 위를 굴러온 그 작고 검은 돌도

그들이 보냈을 것이다."


모든 페이지에 바람이 있다. 거대한 암석에도 눈 위에도 하늘에도 사람들에게도. 여기 나오는 사람들과 짐승은 눈과 바람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저 자연으로 어우러진다. 표정이 너무도 무구하다. 돌멩이의 표정도 옅은 미소를 머금은 그들과 닮았다. 그들과 '나'는 몸짓, 눈짓만 나눈다.


"내가 무언가 물어보려고 하면

그들은 가만히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내 주머니에 비밀의 돌을 넣었다."


작년 겨울, '담마 코리아'에서 명상을 하며 열흘을 보냈다. 공식적으로 말이 허락되는 질문 시간을 제외하고는 묵언해야 했다. 과연 말하기 좋아하는 내가 묵언할 수 있을까. 자신 없었는데 의외로 묵언은 어렵지 않았다. 단지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을 뿐, 마음속으로는 모두와 모든 것과 이야기할 수 있었다.


묵언을 하면서 내 안이 정말 시끄럽다는 것을 알았다. 끊임없이 생각과 말이 만들어졌다. 말을 하지 않으니, 생각과 말, 마음의 구분이 모호했다. 묵언한다고 결코 마음이 고요해지는 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안이 서서히 잠잠해졌다. 수행 막바지, 갑자기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눈물이 펑펑 나왔다. 그 순간 진심으로 원했던 말을 하고 들은 것 같았다.

침묵은 말을 품고 있다. 말이 될 가능성. 어떤 말은 발화되어 흩어지고, 또 어떤 말은 깊게 각인되며, 또 어떤 말은 소용없고 있고, 어떤 말은 귀하다. 내가 하는 대부분의 말은 쓸모와 쓸 데가 없다. 하지 않는 게 나은 말을 굳이 하면서 복잡하게 산다는 생각이 든다. 침묵은 나와 타인의 발화되지 않은 말에 귀 기울이는 자세, 마음이지 않을까.


<작가소개>

비올렌 르루아


1981년에 태어났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장식 예술 학교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했다. 2005년부터 어린이와 어른을 위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책뿐만 아니라 잡지, 동인지에서 창작자들의 모임은 뤼바르부스 집단에 참여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방해> <좋아요. 무슈> <다른 이들의 거리> <어디 있니?> <루다 이야기> 등이 있다.


*우아니 (Uani) 이누이트 어로 '저 멀리'를 뜻한다.


영화 '파니핑크'에 훈훈한 바람을 이르는 '우아그나주'~라는 단어가 있었다. 처음 그 단어를 들었을 때 순간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선명했던 기억이 희미해졌다. 영화가 다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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