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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그리는 목요일_240912

08_낭아초

by 고라니

오늘은 쌈지숲길에서 야생화를 그리는 시간. 싸리꽃인 줄 알고 그리려는데, 선생님께서 "그거 싸리꽃이 아니에요. 낭... 낭…"


낭아초였다. 강릉 가시연습지 주변에서 호들갑을 떨면서 이뻐라 했던 꽃을 알아보지 못했다. 괜히 낭아초 보기, 그리기 민망했다.


여름을 지난 강릉 경포 바닷가는 한적했다. 낮잠을 자다 벌떡 일어났다. 가보자. 읽은 책을 나눔 하는 책방인데 나는 책장을 비울 수 있고 책방 사장님에게는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지 싶어서 4년 정도 해온 일이다. 내가 책을 보내면 책방 사장님은 머그컵, 손수건 등 책방 굿즈와 새책으로 답장을 준다.


5년 전, 책방 사장님은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이었고 나는 손님으로 처음 만났다. 지금까지도 그의 소년 같이 맑았던 얼굴과 다정함이 잊히지 않는다. 여전히 소년 같을까. 나를 알아볼까.


숙소에서 책방까지는 도보로 1시간 40분. 꽤 멀다. 버스는 잘 모르겠고 택시는 내키지 않았다. 어떻게 갈까. 고민을 하면서 이미 경포호수를 끼고 걷고 있었다. 무척 습하고, 후텁지근했다. 10분이나 걸었을까. 몸이 땀과 습기에 절어 갔다. 꾀죄죄한 몰골로 만나고 싶지는 않은데 숙소로 돌아갈까. 계속 갈까. 고민하던 와중에 눈앞에 놀랍고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가시연습지. 잎 표면이 힘줄처럼 울룩불룩 튀어나온 커다란 가시연은 습지를 벌떡 들어 올릴 기세다. 식물이라기보다는 동물에 가까운 느낌. 잠시 바라보는데 내 피부가 가시연처럼 변해가는 것 같아 조금 으스스했다. 무성한 수풀, 코 끝을 스치는 연잎 냄새, 드문드문 봉긋한 분홍 연꽃. 잠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잊을 정도로 가시연습지의 풍경에 빠져 들었다.


사랑스러운 진분홍빛 이 꽃은 뭐지? 아카시아와 닮은 꼴. 아카시아 꽃은 가지에 아래로 주렁주렁 매달려 차분하다면, 이 분홍 아이에서는 명랑하고 활달한 기운이 뿅뿅 솟아 나왔다.


낭아초라 한다. 낭아. 낭랑, 청아와 같은 맑고 동그란 단어들이 줄지어 떠오른다. 낭아초(狼牙草)는 한자로 '이리의 어금니'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리의 어금니 한 번 보고 싶네. 보고 싶은 마음은 생각을 부풀려 상상을 키운다.


낭아초는 꽃말도 낭만적이다.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꽃. 낭아초 한 송이 한 송이 아리따운 분홍꽃들이 사랑을 부르러 어디론가 신나게 걸어가는 모습이 연상된다. 어느새 나도 그렇게 걷고 있다. 잠시 내 얼굴을 비춰 봤다. 그냥 돌아갈까. 복숭아향 립밤을 발랐다. 주저하면서 책방 문을 밀었다.


여전히 초롱초롱한 눈망울. 친절한 모습. 나를 알아보지는 못했다. 짤막하게 인사를 나누고 책과 몇몇 소품을 골랐다. 계산을 하는데 그는 멀리서 온 내게 뭐라도 챙겨주고 싶었는지 "이거 드렸나요? 저 책은요?" 물었다. "티셔츠도 책도 다 주셨어요. 뭐 안 주셔도 돼요." 나에게 보낸 것들을 그는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작정한 듯 목장갑을 끼더니 책방 밖으로 나가 가로수 아래 심어 놓은 애플민트 몇 뿌리를 봉지에 담아 챙겨주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 나와 애플민트만 있는 듯했다.


바다가 보이는 의자에 앉았다. 사람들의 뒷모습이 작게 보이는 고요한 바다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바다가 어둠에 묻혔다. 바다에게만 진짜 속마음을 보냈다.


오래 미루어 두었던 마음을 머뭇머뭇 걸어냈다. 분홍 꽃망울로 쌓아 올린 마음이 졌다. 그저 그곳에 갔다가 돌아와 지금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는 게 좋았다.


5년 전 “여행을 하면 나를 좀 더 사랑하게 되는 것 같아요.” 내가 여행하는 이유를 말하자 “어떻게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가 있어요?” 그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거짓말을 들킨 기분. 두고두고 그의 말이 나에게 되돌아왔다. 나는 나를 사랑하고 싶었다.


식물을 채취해 놓고 관찰하면서 그리기도 하는데 어쩐지 낭아초는 꺾을 수 없었다. 사랑을 노래하러 가는 길을 내가 막을 수는 없지. 낭아초 동그란 잎들이 꼭 낭아초 꽃 그림자 같다.


여행을 떠났다가 집에 돌아오면 손톱부터 자른다. 이번에는 강릉에서 집으로 돌아온 지 이틀이 지난 뒤에야 손톱을 잘랐다. 책방에서 사 온 커피 비누바는 유통기한이 1년이나 지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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