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_청미래덩굴
쌈지길 등산로에 접어드니 쥐꼬리망초, 달개비, 마삭줄, 청미래덩굴. 아는 얼굴이 쏙쏙. 무얼 그릴지 모르는 지금이 가장 들뜬다. 나무뿌리 근처를 목걸이처럼 두르고 있는 반딱이는 얄쌍한 하트 모양 덩굴식물. 이름은 모르지만, 어딘가 낯이 익다. 막상 스케치를 하려 연필을 드니 그리고 싶은 마음이 시들시들.
연필을 놓고 다시 어정어정. 돌아다녔다. 청미래덩굴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잎의 둥긂. 지그재그로 뻗어나간 줄기. 과거 회상이 주특기인 나에게 '청미래'라는 이름은 추앙받아 마땅했다.
"열매가 있을 것 같은데... 한 번 찾아봐요."
"열매 없는 것 같아요."
"열매가 9월이면 익는데.. 열매가 있겠죠."
열매 생각은 못했는데, 열매 찾기를 추천하는 선생님. 뒷짐 지고 쓱 둘러봐도 청미래덩굴 열매는 보이지 않았다. 괜히 수고롭기 싫었다. 여기서 더 많은 땀을 흘린다면... 모기들이 들러붙어서 몹시 간지럽고 짜증스러운 미래로 데려갈 것이고... 그러면 식물 그리기는 포기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안전한 곳에서 그림 구도를 생각하며 사진을 고르고 있었다.
"열매 있네요. 여기와 봐요. 있잖아요."
선생님은 쌈지길 비탈의 중심에서 열매를 외치고 있었다. 아슬아슬. 비탈진 곳을 올랐다. 비탈길에 쪼그리고 앉아 있으니 땀이 삐질삐질 났다. 그곳의 청미래덩굴은 색이 좀 더 짙었다. 둥근 잎 아래에 졸랑졸랑 맑은 연둣빛 열매가 달려있었다. 청포도 색과 비슷했다. 포개진 잎 사이를 걷어 보니 열매가 꽤 있다. 열매를 자세히 보려다가 잎 끝에 돋아 있는 가시에 찔렸다. 따꼼했다. 갈고리 모양 가시는 성능이 무척 좋았다. 따끔한 맛을 보고 나서야 줄기에 드문드문 돋아 난 붉은 빛깔. 짧고 딴딴한 가시가 보였다.
본다고 보이는 게 아니었다.
선생님의 '열매 찾기 나섬'이 없었다면 청미래덩굴의 반전 매력인 가시 없이 그릴 뻔했다. 질문도 생겼다. 내가 본 청미래는 왜 열매가 없었지. 엄마가 식물에도 암, 수가 있다고 말했던 게 생각났다. 흘려 들었는데 이 순간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 진짜였다.
"가을철이 되면 빨간 열매가 암나무에 모여 붙는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니들... 혹시 열매를 지키기 위해 눈에 덜 띄는 비탈진 곳에 있는 거니?
9월의 초입. 물들어 가는 은행잎과 익어가는 벼도 청미래덩굴 열매 색처럼 보인다. 시간이 좀 더 흘러 열매가 빨갛게 익으면 곱겠다. 푸른 미래덩굴의 미래인 붉은 미래덩굴을 상상해 본다. 그 맘 때면... 내 미간 주름도 좀 더 깊어지겠지. 그 마저 고울런지도.
흠... 너무도 청청한 미래를 꿈꾸었을까. 청미래덩굴 이파리 색이 짙어도 너무 짙푸르다. 미래를 향한 과한 욕망이 그림에 투영되었나 보다. 다시 그려야 하나.
그나저나 선생님. 청미래덩굴 열매를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어쩐지 낯이 익던 하트 덩굴은 마였다. 집 텃밭에서 흔하게 보았던 것인데 장소가 바뀌니 못 알아 보았다.
보인다고 보는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