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 않은 저녁 메뉴

by 고라니


이불속에서 나오는 시간이 늦어진다. 나만 그런 게 아니고... 엄마, 아빠 모두. 오늘은 8시가 다 되어서 아침을 먹었다. 아빠도 눈 떠보니 6시 30분이었다고 한다. 어제, 오늘 아빠는 매일 같이 해 오던 새벽 5시 운동을 놓쳤다. 내가 큰 방으로 넘어가면 엄마는 소파에 앉아서 뉴스를 보곤 했다. 오늘은 밥상이 들어오니 그제야 천천히 이불을 벗어놓듯 나오며 엄마는 말했다.


"이제 나를 데려간대."

"꿈꿨어? 무슨 꿈인데."

"조용히 데려갈 거래."


먼 곳에 혼잣말하듯 소곤대는 엄마. 그 얼굴에 그늘처럼 드리워진 옅은 미소가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 다른 때 같으면 "왜 그래. 죽을 때 죽더라도 제발 그런 말 좀 하지 마." 쿡쿡 찌르는 말을 퍼부었을 텐데... 오늘 아침은 그냥 넘어가졌다. 엄마의 미소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손톱이 이렇게나 길었었다. 발톱은 더 했다. 이렇게 길 동안 나는 어떤 시간을 보낸 거지. 요즘 정신이 팔려 사는 건 맞다. 내 몸과 정신을 제3의 내가 여기저기로 정신 못 차리게 휘두르고 다니는 것 같다. 정신 차리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안경 없이 맨 눈으로는 자란 발톱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아 만지며 가늠하며 천천히 잘랐다. 손톱 미는 걸 잊었다. 오늘은 내 손을 조심해야 한다. 할퀼 수 있다.


나갔다 오겠다 하니 이불 속 엄마 등이 갔다 와. 희미하게 말한다.


제3의 내가 나에게 버스 시간표를 보여준다. 오전에 카페에 갔다가 점심 맞춰서 버스를 타고 나가기로 합의했다. 제3의 나. 그렇다면 제1의 나, 제2의 나도 있다는 말인가. 말이 안 되지만 '제3의 나' 나와 거리감 있는 나 인 듯 아닌 듯 모호한 존재 같아서 마음에 든다.


제3의 나는 카페에서 이원의 11월 '물끄러미'를 읽는다. 예술대학에서 시 창작 수업을 하는 이원 시인이 학생들의 질문에 응답하는 인터뷰 꼭지가 있다.


p52-53

시쓰기 속에서 '나'를 찾고 싶습니다. 고유의 감성, 철학 등을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요. 요즘 이상하게 저를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이럴 때 그저 독서를 하거나 계속 써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시쓰기는 나를 찾아다니는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나를 돌아다니기 위해 글을 쓴다"라는 앙리 미쇼의 문장을 좋아해요. 자신을 모른다는 의문이 들 때가 가장 열렬하게 자신과 가까워지고 있는 시기일지 몰라요. 계속 쓰고 읽으면 만나게 돼요. 깊은 곳의 내가 인사를 해와요.


나를 찾고, 돌아다니기.

숨바꼭질이 떠오른다. 다른 놀이와 달리 숨바꼭질은 남겨지는 상상을 하게 만드는 놀이였다. 친구들이 숨바꼭질을 하자 하면 "그래! 좋아!"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술래를 정하는 가위바위보를 했다. 술래일 때는 괜찮았다. 누가 어디에 숨었을까. 예감하며 놀이터 주변을 돌아보는 건 흥미로웠다.


내가 숨어야 할 때면 이런 상상이 따라왔다. 내가 숨고, 친구들이 나를 찾는 동안 급격히 해가 지고 어두워진다. 친구들이 집으로 돌아간 걸 모르는 나는 혼자 어둠 속에 계속 숨어서 누군가 찾아주길 기다린다. 끝까지 남은 나를 아무도 찾으러 와주지 않는다. 분명 상상인데 숨바꼭질을 떠올리기만 해도 겪은 일처럼 무섭다.


글쓰기를 통해 나를 알고 싶었다. 찾고 싶었다. 회복하고 싶었다. 하지만 찾은 내가 썩 마음에 들지 않을까 봐 두렵다. 찾았다는 결과치가 아니라 찾아다니는 거라면... 돌아다니는 거라면... 괜찮을 거 같다. 좀 더 쓸 수 있을 것 같다. 쓰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


구불구불 엄마 / 이원



내가 운전하는 차에 엄마가 탔다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하고도 문 위쪽 손잡이를 꽉 잡고 있다


엄마와 나는 엄마도 나도 모르는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엄마를 중간 어디쯤 내려주었다

나도 엄마도 예상 못한 전개였지만

엄마가 내린 곳은

엄마가 좋아하는 들꽃이 있고

나무 벤치도 보였다

차분한 살구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차에서 내린 엄마는 주황색 큰 꽃처럼 보였다

언덕은 바람이 무릎을 접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내리기 전

저기 가서 맛있는 피자 먹으면 좋겠다

갑자기 보이지도 앉는 가게가 보이는 것처럼

자주 먹지도 않는 피자를 말하면서

갑자기 입맛을 다시면서

셋이 우리 셋이


돌바닥으로 된 골목을 간신히

구불구불 빠져나오고 있던 때였는데


엄마가 내리고

엄마가 차로부터 멀어지는데

엄마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은 나였는데

엄마랑 같이 피자 안 먹은 게 떠올랐다 길을 돌고 돌아

내가 다시 엄마 찾아갔다 노란 호박꽃 옆에 엄마 잠들어 있다

깨워도 안 일어난다 호박꽃 옆 엄마 얼굴 편해 보인다

꽃과 풀 사이에서 깊이 잠들었다

노랑 엄마 초록 엄마 노랑 초록 엄마 엄마

동생에게 전화하는데 숫자가 안 눌러진다


엄마는 어디쯤 있는 걸까 걷고 있는 걸까

쉬고 있는 걸까 하염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햇빛이 엄마 얼굴에 해바라기씨처럼

엄마 발목에 꿀벌처럼 와글와글 붙는다


우리 엄마는 코스모스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엄마 아직 같이 먹어야 할 끼니가 남았어


허공이 청진기처럼 듣고 있는 말

허공이 태동처럼 품어주는 말


엄마 거기 있어 내가 지금 갈게


<이원, 물끄러미, 170-172p>



이원 시인의 '구불구불 엄마'를 옮겨 적고 나니 제3의 나가 점심 메뉴를 묻는다. 12시 10분 버스를 타고 내리면 햄버거 가게가 있어. 나는 치킨 버거 세트를 주문할래. 저녁으로는 엄마가 잘 먹는 쪽갈비를 간장에 조릴 거야. 제3의 나가 묻지 않은 저녁 메뉴까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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