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타면, 간판을 멍하니 볼 때가 있다. 어제도 그랬다. 간판멍이라고 해야 하나. 언제나 읽을거리가 습관처럼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낯선 거리를 걸을 때도 맵을 켜고 간판을 하나하나 보며 걷는다.
이제 777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은 불안하지 않다. 전엔 버스가 도착하기 전까지 늘 불안했다. 정류장에 혼자 서 있다 보면 별별 생각이 다 든다. 버스가 나를 못 보고 슉 지나가면 어떡하지. 버스가 안 오면 어쩌지. (정말 쓸데없는 걱정) 안절부절. 정류장을 왔다 갔다 하면서 불안을 키운다. 버스를 놓칠까 그동안은 집에서 너무 일찍 나와 긴 시간 버스를 기다렸다. 그래서 불안감이 더 부풀었던 것 같다. 이제는 버스가 차고지에서 출발하는 시간보다 5분 늦게 나간다. 5분 정도 기다리면 777 버스가 보인다.
777 버스는 광양으로 가는 버스다. 광양에는 친구가 살고 있어서 내적 친밀감이 있다. 일주일 전쯤, 광양중앙도서관에 갔다가 분위기에 홀딱 반해버렸다. 버스로 40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제 777 버스를 타고 광양중앙도서관을 향해 출발했다. 도서관이 평지가 아닌, 오르막 위에 있는 것도 좋다. 오르며 소소한 벽화를 보는 재미도 있다.
붉은 리본과 금색 방울로 꾸며진 반짝이는 트리와 다정한 눈사람, 선물상자로 꾸며 놓은 입구가 아늑한 거실 같다. (우리 집 거실이었으면...) 한편에 산타옷과 모자, 장갑, 루돌프 머리띠 등 소품을 두어 즐거운 분위기를 더한다. 원형으로 된 큰 글자 서가에 책을 베개 삼아 늘어져라 누워있는 커다란 곰도 아주 많이 귀여웠다. 이 풍경 속 나는 아이가 된 마냥 심장이 콩콩콩 날뛰뛰었다.
층계가 나선형인 것도 설렘 포인트. 1층에는 북카페도 있다. 500원이면 원두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다. 동전이 없어서 커피는 다음에.
2층으로 올라가면 종합 자료실 가는 길목에 노트북을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컴퓨터도 사용할 수 있고 복사와 스캔도 된다. 예전에는 대부분의 도서관에서 복사를 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도서관이 별로 없다. 복사기와 스캐너가 있는 풍경만으로도 옛날 도서관에 온 마냥 추억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안과 밖을 연결하는 브리지 위치에 있어서 답답하지 않다. 겨울의 도서관은 따뜻하다 못해 숨 막힐 때가 있는데 실내와 실외의 중간 느낌이라 갑갑증이 생기지 않았다. 벽에 아이들의 시가 액자에 담겨 전시되어 있는 것도 정겨웠다. 맘에 든다. 맘에 든다. 전부 다.
여기서 글을 쓰고 싶다. 나는 노트북을 풀어놓고 그림책을 꼼꼼하게 읽어나갔다. 글쓰기에 2시간 정도 집중하다가 종합자료실로 가보았다.
와. 와. 이 고즈넉함. 책들은 책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편안하다. 구석구석 공간을 야무지게 아주 잘 활용했다.
신발 벗고 들어가 동그란 창 너머 풍경이 보이는 햇살 잘 드는 다락방 같은, 편안한 소파에 몸을 푹 파묻고 느슨하게 잠깐씩 졸며 책을 읽기에 좋은, 제대로 마음먹고 공부하는 마음으로 책을 볼 수 있는 각 잡힌 테이블과 의자, 자연 가까이나무와 수풀을 바라보며 책을 보거나 노트북을 사용할 수 있는 공간들. 너르지 않은 공간인데 신기하게도 여백이 많은 느낌. 심리적인 편안함 때문인 듯도 했다.
여기 있는 의자 의자마다 돌아가면서 앉아 책을 읽고 싶다. 여기서 책을 보면 어떨까. 어떤 책이 어울릴까. 도서관에 왔을 뿐인데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기분이 든다. 올해도 도서관에서 알차고, 뜻깊고, 재미난 시간들을 보냈다. 마음이 정처 없을 때, 도서관이 있다는 건 정말 큰 위안이 된다.
연향, 삼산도서관에 매달 빌려 본 '희망도서'들, 아이들의 천진한 목소리가 듣고 싶으면 향하던 기적의 도서관, 연향도서관_클래식 공연, 조례호수도서관_'보태니컬 아트 인 호수_식물 세밀화 그리기 수업, 광양 희망도서관_길 위의 인문학 '나를 묻다. 그림책이 답하다', 광양중앙도서관의 소설 '카페 네버랜드' 낭독극 공연 등등. 실로 풍성하다.
다음 주는 연향 도서관 '도서관에서 만난 사람' 오은 시인과 서율밴드도 만날 예정이다. 도서관에 다니면서 친구도 사귀고 혼자서는 꾸준히 하기 힘들었던 일도 마무리했다. 각각의 도서관은 개성 있는 친구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도서관에 가면 덜 외롭다. 혼자인 이들이 대부분. 그 속에 그저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오늘은 어떤 친구를 만나지... 방문을 열고 걷다 보면 도서관 친구가 나온다. 부담이 없다.
광양중앙도서관은 당분간 내게 여행지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다. 도서관 근처에 가보고 싶은 국숫집도 생겼다. 도서관에서 오전 내내 책 보다가 출출해지면 뜨끈한 잔치국수 한 그릇을 먹고 하얀 입김을 햐햐~ 내뿜으며 다시 도서관을 향해 올라가는 길.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
방금, 내일이 책 반납일이라는 도서관 친구의 다정한 문자 메시지가 왔다. 나의 연체를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크크.
도서관에 가려고 가방을 싸는 순간, 여행가방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