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웅웅웅

by 고라니

오징어 뭇국을 끓여 아침을 먹었다. “오늘따라 뭔가 더 울적하다.” 내가 말하니 아빠는 자신도 그렇다 한다. 점심에 맛있는 걸 먹자! 아빠는 어젯밤부터 감기 기운이 있어서 누워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이불속에서 나오기 싫었지만, 수업 준비를 해야 해서 옷을 갈아입었다.


스벅에서 두 시간 여 수업 준비를 한 뒤, 집에 가서 오징어를 넣은 김치전을 부쳤다. 아빠는 전 중에 김치전을 제일 좋아한다. 나는 전은 전부 좋다. 해물파전, 부추전, 배추전, 고추전, 깻잎전... 참나. 막걸리가 없을 건 뭐람. 상상도 못 했다. 남은 막걸리를 아빠가 홀로 홀짝 홀짝 마신 탓이다. 미리 여분의 막걸리를 쟁여두지 않은 내 탓이지 뭐.


요즘 틈만 나면 책 읽기에 여념이 없던 아빠였는데, 컨디션이 안 좋긴 안 좋나 보다. 나도 몸이 무겁고 이불속에만 있고 싶다. 집에만 있으면 아빠나 나나 더 쳐질 것 같아서 도서관 근처 카페에 함께 가자며 아빠를 꼬셨다. 아빠는 늙은이가 카페는 무슨 카페냐며 나와 눈도 안 맞추고 싫다 했다. 대추차가 진하고 맛있다며 감기 기운이 똑 떨어질 거라고 같이 가자. 거듭 꼬셨다. 아빠는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다. 1년 전만 해도 아빠가 앞장서서 걷곤 했는데 아빠 걸음이 부쩍 느려졌다. 그래도 함께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어제보다 날이 많이 풀렸다. 볕이 따사로웠다. 괜히 '엄마 엄마' 불러본다.


대추차와 오미자차를 주문했다. 테이블이 있는데도 아빠는 굳이 허벅지에 책을 놓고 삐딱한 자세로 책을 본다. 눈으로만 보다가 입을 우물우물하기도 한다. “반납해.” 이정록 작가의 '아들과 아버지'를 탁 내려놓더니 바로 '시골쥐의 서울 구경'을 집어든다. 집에서 하듯 소리 내 읽을 수 없으니 입만 움찔움찔한다. 작게 소리 내도 괜찮을 텐데 아빠는 생각보다 훨씬 주변을 의식한다.


오늘따라 카페에 10명 정도 되는 손님이 줄을 잇는다. 단체 손님이 무려 두 팀이나 왔다. 사람으로 북적이고 머신에서 커피 내리는 소리, 어수선하고 호들갑스러운 웃음으로 시끄러웠다. 아빠는 아랑곳하지 않고 책장을 넘겼다. 되려 내가 더 집중하지 못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분위기였다. 30분이나 앉아 있었을까. 아빠와 함께 도서관에 갔다. 아빠는 도서관 공기가 답답하다며 소파에 앉아 있겠다 했다. 아빠가 볼 만한 책을 찾아 2층으로 올라갔다. 가만 보니 옛이야기를 재미나게 읽으신다. 한 편의 분량이 짧고, 이야기 전개 속도가 빨라 아빠에게 알맞다. 서정오 '멍 서방과 똑 서방' , 이주홍 '청어 뼉다귀' 두 권을 빌렸다.


집에 가는 길에는 꽤 바람이 분다. 마트에 들러 막걸리, 상추를 샀다. 점심에 못 먹은 막걸리를 저녁에 한 잔 할 생각으로다. 상추는 내일 점심 삼겹살 구이와 함께할 예정.


놀랍다. 집에 도착한 아빠는 바로 책 읽기에 돌입했다. 웅웅웅 소리가 아빠 방에서 흘러나온다. 가만 들어보니 전에 없던 리듬도 저절로 만들어진다. 더듬더듬한 노래 같기도 하고 염불 하는 소리 같기도 하다. 분명 살아있는 소리다. 한 자 한 자 놓치지 않고 정성스럽게 꾹꾹 눌러 읽는다. 읽다가 멈춰서 내용을 정리하기도 하고 소감을 말하기도 한다.


“서울쥐 시골쥐가 나오는데 그게 쥐겄어. 사람이지.” “공부는 꼴찌고, 장난은 일등이 고만, 뭣이고 잘하면 되지.”

“재미있어?”

“시간 보내는 거지. 재미는 그렇고 그렇지. 뭐.”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아빠의 요즘은 밥 먹고 나면 무조건 책이다. 하루 4~5시간은 책과 함께다. 컨디션 안 좋을 때 빼고는 내가 설거지하는 동안 웅웅웅웅 소리가 멈춤 없다. 책날개, 뒤표지까지 샅샅이 읽는다. 어떤 날은 책에 빠져 뭘 물어도 대꾸가 없다. 책 읽기를 시작하면서 무엇보다 좋은 건, 아빠의 잔소리가 확 줄었다는 것이다. 조카에게 읽어줄 그림책을 빌리기 위해 밖에 나가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아빠가 재미있게 읽을 책을 빌리기 위해 나간다.


책을 소리내 읽는 아빠 모습. 엄마와 셋이 살던 일상에서는 없던 장면이다. 엄마 빈자리에 책의 소리들이 내려 앉는다. 눈 오는 풍경처럼 고요하다. 제법 해가 길어졌다. 아빠는 책을 쥐고 읽고 더듬으며 겨울에서 봄으로 한 줄 한 줄 천천히 내딛는다.


돋보기 끼고, 한 손에 장갑까지 끼고 책을 읽을 정도면 재미있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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