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연필

by 고라니

어디서 굴러온 건지. 언제부터 서랍 안에 있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낯선 연필 하나. 내 것인지, 누군가의 것인지도 판단이 안 서는 혼란스러운 상태로 연필을 쥐었다. 손에 착. 쥐었을 뿐인데 제법 비장한 각오가 생긴다. '너로 끝까지, 쓰겠다.' 연필은 오랫동안 여기서 꼼짝 않고 오로지 나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글썽였다. 만약, 연필에게 눈망울이 있다면 말이다. 연필에게 눈이 있다고 잠시 망상했을 뿐인데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연필심. 왜 이제야 나를 보냐며 투정보다 원망에 가까운 감정. 이제라도 보아 주어 다행이라는 안도감은 또 뭐람. 복잡 미묘.


연필심이 쓰기에 딱 적당했다. 너무 높아서 부러질까 염려하지 않아도 되고 너무 낮아 쓰기도 전에 닳아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일지 않을 만큼. 자세히 보니 연필에는 아주 작게 manuel*_마뉴엘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새 연필은 아니다. 칼로 깎은 흔적이 남아 있다.


마뉴엘을 챙겨서 평일 아침마다 죽치고 있는 카페로 왔다. 늙은 커플로 보이는 손님이 있다. 늙은 커플 중 여자의 목소리는 베일 듯 날카롭다. 되도록 늙은 커플과 거리를 두고 앉았다. 커피는 따로 주문할 필요가 없다. 6개월 정도 아침 8시 30분에 이곳에서 오니 이제는 사장이 알아서 커피를 준다. 원두는 조금씩 바뀌는 것 같다. 신기하게도 커피 첫 모금에는 순간이동을 하는 기분이 든다. 이곳도 저곳도 아닌, 어떤 곳에 뚝 떨어뜨려 놓는다. 커피 한 모금의 여운이 가실 때 즈음이면 다시 이곳으로 뚝 떨어진다. 나는 그 순간을 첫 모금의 마법이라고 부른다. 마지막 한 모금이 남았을 때는 카페와도 이곳에 있었던 나와도 작별하는 기분이 든다. 아주 잠깐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황량한 마음이 스미는데 그때는 가만히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몸을 맡긴다.


도로 건너에 있는 산의 풍경이 언제 이렇게 달라졌던가. 흰 꽃구름들의 행렬들이 줄지어 산의 능선을 따라 이어지고, 군데군데 분홍, 진분홍 꽃나무들이 흰꽃나무 사이로 보인다. 저곳으로 가고 싶다. 꽃 향기를 맡고 싶다. 엇. 꽃향기가 흘러 들어온다. 카페 창은 굳게 닫혀 있는데. 환각, 환후인가. 환후라는 말 자체가 쓰이는가. 이 순간 혼자라는 게 안타깝다. 그렇다고 늙은 커플에게 꽃향기가 나는지 물어볼 수는 없다. 카페 사장은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다. 답답하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흘러 들어오는 샹긋하달까. 달큼한 냄새. 분명 꽃 냄새다.


카페로 한 팀이 더 들어온다. 대학생 커플로 보인다. 둘은 마주 보고 앉았다가 옆자리에 앉았다가 잠시 대화를 나눈다. 여자가 책을 챙겨 자리를 이동한다. 남자는 책을 읽고, 여자도 책을 읽는다. 함께 와서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그들의 대화는 인상적이다. 남자가 불면을 호소하고 여자는 명상의 각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늘은 명상을 하지 말고 잠들어 보라고 여자는 권한다. 미국에서는 아기를 낳으면 동전에 이름을 새겨준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다. 동전과 이름. 조금 더 알고 싶다. 물어볼 수는 없고 검색을 해본다. 스크롤을 한 페이지 가까이해 보아도 여자의 이야기는 찾을 수 없다. 여자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대신 스테이시 박 밀번과 25센트 동전에 관한 이야기로 눈을 돌린다. 노트에 '스테이시 박 밀번*과 25센트 동전'이라고 적는다. 적고 나서 보니, 마뉴엘. 마뉴엘의 마음이 함께 작동한 것 같다.


마뉴엘로 쓰다 보면 나도 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무기력한 삶에서 유기력한 삶으로의 전환. 단번에 변하지는 않더라도 스멀스멀 쥐도 새도 모르게 변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가 위험하다는 건 경험상 알고 있고 밑바닥으로 나락으로 한 방에 보내는 것도 기대임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품어 보고 싶다. 망할 기대. 마뉴엘은 망할 '망'의 이응을 니은으로 수정한다. 만할 기대? '만'의 미음 위에 선을 짧게 그어 '반'으로 고친다. '반할 기대'라니.


카페를 나와 창 너머 줄줄이 꽃나무를 향해 걷고 있었다. 마뉴엘의 연필 끝이 그곳으로 가보라고 쿡쿡 찌르는 느낌. 언덕길이라, 휘청대며 걷는데... 꽃향기가 훅훅 나를 감싼다. 나무 아래에서 앉았다 섰다를 반복했다. 너무 좋아 어쩔 줄을 모르겠어서.


마뉴엘, 좀 이상한 연필이 내게 왔다.



*스테이시 박 밀번 : 박지혜


장애인 인권 운동가로 활동한 한국계 미국인, 2025년 8.10. 고인의 모습이 새겨진 25센트 동전이 발행됐다. 고인은 생전 공립 고교 교육과정에 장애인 역사를 포함시키는 노스캐롤라이나 법안 작성과 통과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미국 전역에 이름을 알렸고, 2014년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는 장애인 정책 자문위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녀는 주한미군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으며 태어날 때부터 근육 퇴행성 질환인 근이영양증을 앓고 있었고, 미국 이주 이후 지체장애인으로서 사회 곳곳에서 겪는 불편함과 부당함 등을 담은 글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고 이 글들이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청소년 장애인 인권 운동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코로나 19 때는 장애인과 저소득층, 노숙자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마스크와 긴급 의약품. 위생용품을 전달하는 데 앞장섰다. 신장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었던 그는 수술 후유증으로 2020년 5.19. 33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manuel : 프랑스어_ 손으로 하는, 수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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