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이 머무는 나무가 있나요

-뒷산 수리나무에게

by 고라니

"숙미 씨는 도서관 사람 같아요."

정말 맞는 말이라서 웃고 말았어요. 도서관이 있어서 책도 빌리고, 그림책도 만들고, 깔깔대며 우정을 나누는 친구도 생겼어요. 의기소침해질 때면 으레 도서관으로 발길이 향해요. 한 달에 3권 신청할 수 있는 희망도서는 저에게 늘 희망이 되어 주어요. 1월 희망도서 목록입니다. (이수형, 무빙워크 / 박신양, 제4의 벽 / 김민정, 읽을, 거리)


작년 말, 도서관에서 '일상을 보듬는 에세이 쓰기' 수업을 들었어요. 선생님께서는 서른 줄 분량의 A4 종이를 매 시간 내주었어요. 50분 동안 노트북 아닌 손 글쓰기로 한 편의 글을 완성하기. 처음엔 부담이었지만, 써내려 갈수록 흥미진진했어요. 글을 제출할 땐 후련하고 뿌듯했어요. 다음 시간에 받게 될 선생님의 다정한 코멘트도 기다려졌고요.


'편지 쓰기' 수업. 처음엔 조카에게 편지를 써야지 했는데 손이 쓰기를 망설이는 거예요. 입이 안 떨어지는 것처럼 손이 잘 떨어지지 않더라고요. 잠시 눈을 감고 누구에게 쓸까 엄마, 아빠, 친구... 대상을 떠올려 봤습니다. 그러다가 예상 밖의 편지가 시작됩니다.




뒷산 수리나무에게


너를 떠올리다니...


내가 너에게 편지를 쓰게 되리라고는 너도 몰랐겠지만 나도 몰랐어. 조카, 나 자신, 친구, 부모님 중에 누구에게 쓸까. 누구 이름을 불러볼까. 왔다 갔다 하다가 뜬금없이 네가 우뚝 솟아났어.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열리기를 가만히 기다리는 네 마음이 내게 닿았어.


집에 돌아가는 길이면 우람한 자태로 유독 장엄하고 굳건하게 서 있는 너를 멈춰 바라보곤 했어. 뒷산에 오르지 않아도 널 볼 수 있어서 좋았어. 늘 그 자리에 네가 있어 참 든든해. 몸과 마음이 쉬이 들뜨고 한 자리에 있지 못하는 내게 너는 참 믿음직하고, 우러러볼 수 있는 친구야.


너와 친구가 된 지 어느덧 1년이 지났어. 지난해 몸과 마음이 무너져 내린 순간에 뒷산에 올랐다가 너를 보았어. 이전까지는 네가 있는지도 모를 만큼 무관심했는데... 네가 나를 향해 팔 벌리고 있구나. 너도 나를 보고 있구나. 알게 된 순간부터 네 앞에 멈춰 서서 마음속으로 인사를 건넸어.


상수리나무인 너를 '수리나무'라고 불렀어. '수리수리 마하수리' 언제나 내 마음속에는 마법이나 기적을 믿는 순간이 꿈틀거리거든. 너를 만난 것도 우정과도 같은 감정을 나눌 수 있게 된 것도 신기해. 네 앞에 산 자세로 가만 서있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고요해졌어. 눈을 감고 아무 말하지 않아도 너는 나를 내 모습 그대로 받아주었어. 땅을 힘껏 딛고 몸을 바로 세우고 서 있으면 너처럼 나무가 되는 듯했어. 너는 하루도 같은 모습일 때가 없었는데 틀린 그림 찾기 하듯 네 앞에서 우두커니 서서 눈을 반짝이며 어제와 달라진 너의 모습을 짚어보기도 했어.


너를 만나러 가는 길, 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너와 나 사이를 오가면서 동고비, 후투티, 딱새, 곤줄박이... 전엔 알지 못했던 새들을 보게 되었어. 새들의 사랑스러움과 명랑함에 나를 억누르던 불안, 우울 같은 감정들이 맥을 못 추더라. 한 번은 새끼 고라니의 눈을 본 적 있는데 심장이 어찌나 콩닥대던지. 너와 너의 친구들 덕분에 나는 나를 다시 일으킬 수 있었어. 생명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구나. 몸소 느꼈어.


그나저나 우리 이번 봄까지만 보고 여름, 가을 두 계절이 휙 지나갔네. 작년 가을까지만 해도 매일 보다시피 했는데... 나 이제 좀 살만해졌나 봐. 아니 게을러졌나 봐. 편지를 쓰다 보니 네가 보고 싶군. 수리나무야! 곧 만나자. 네 앞에 그저 가만 서있고 싶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네 이야기를 듣고 싶어.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마법 같은 일이야. 수리수리 수리나무야. 나에게 나타나주어 고마워.

2023. 11.23




당신에게도 자꾸 눈길이 가는 나무가 있나요? 당신의 다정한 눈길만으로도 이미 나무는 당신을 친구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누구보다 잘 들어줄 거예요.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어요. 책도 나무죠. 그래서 우리는 책과 쉽게 친구가 되나 봐요. 마음이 힘들 때 나무 앞에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나무 옆을 지나며 바라보기만 해도 괜찮아졌어요. 당신의 나무 친구도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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