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너에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풀씨 Nov 05. 2023

너에게 _ 비가 왔어. 나는 산길을 돌아왔지

2023 11 05 sun

너에게


밤 사이 비가 왔어. 

출근길에 신발이 망가지는 게 싫어서 산길로 오지 않으려 했는데

네 생각을 좀 더 하고 싶어서 결국엔 산길로 들어서서는 좀 더 먼 길을 돌아 집에 왔어.

(난 집에서 집으로 출근해. 자는 집과 일하는 집. 나에겐 두 곳의 집이 있어.)


밤나무 길로 접어들었을 땐

너와 이 길들을 걷게 되길 바랐지. 

이제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을 수도

또 내가 너를 와락 끌어안을 수도

또 내가 네 앞에서 눈물을 터트릴 수도 있겠지.

그리고 그 모든 걸 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

또는 할 수 없거나.


그때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었지만 

결국 모두 우리의 몫이 되었구나.

그래서 너와의 길이 갈렸던 그 해 겨울에

나는 혼자 조그맣게 분노하고 아파했단다.

너 모르게 너 대신. 

그걸 분해하거나 아파하는 나를 보이면

너에게 상처가 될까 봐 그런 나를 내색하지 않았지.

열일곱, 그 후로 너도 나처럼 수많은 길을 만나며 

살아왔겠지.

살아온 모든 길이 우리의 선택이었든 아니었든 

결국엔 우리의 선택이었다고 받아들이고 있어.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길들을 계속 걸어가야 한다는 것도 알아.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그 길에 서로를 초대할 수도 있을까?

너는 나를 만나는 30년 뒤를 상상해 본 적 있니?

나는 없었어.

그건 불가능해야 하는 일이라고 믿었어.

내 생각에 우리는 서로에게서 사라져야 했으니까.

특히 내가 너에게서.

그렇게 너를 닫아 두고. 묻어두고 잘 살아왔는데

2023년 가을 오후(9월 29일 오후 3시경)에 너는 다시 내게 달려왔어.

이 모든 게 나만의 일일까?


그렇지만 그렇더라도 너도 알고 싶지 않니?

과거의 우리가 우리에게 던졌던 질문의 답을.

그 미래에 와 있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니?


너도 그때의 우리에게

"잘못된 건 아무것도 없단다, 얘들아." 하고 말해주고 싶지 않니?

나는 그때의 우리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었는지를

열다섯에서 열아홉 살의 너와 나에게 말해주고 싶어.


비가 왔어.

나무들은 비에 흠뻑 젖어있고

길에는 얕은 물웅덩이들이 생겨났지.

그 물웅덩이에 무엇이 담겨있는지 잠시 들여다봐.


어느 날의 너는 비 오는 운동장으로 뛰쳐나가고 싶다고 했어.

너는 그렇게 하지 않았겠지.

뭐든 다 해낼 것 같은 너는 그렇게 하지 않아.

너는 아무렇게나 해버리지 않아.

오히려 얌전한 척 앉아있던 내가 제 멋대로였다는 걸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알게 되었어.


너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어.

다른 친구들이 실컷 표현해주고 있어서 

너도 그걸 알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내가 말해준 적은 없었잖아.

너를 아껴주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대한 너의 생각을

물어봤더라면 좋았을 텐데... 


비가 오는 날이면 네가 적어준 노래들을 불러보곤 해.

열여섯의 나에게 아프로디테 차일드는 어리둥절했다는 걸 고백할게.

그러나 지금은 하루 종일 캐논 변주곡을 듣는 날도 있어.

네 덕분이야.


그럼, 잘 자.

나는 좀 더 일을 하다가 퇴근할 거야.


2023 11 05 sun


지현




매거진의 이전글 너에게_너를 잊고 어떻게 이렇게 오래 살았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