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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씨 Dec 30. 2023

너에게_눈이 온단다_더 소중한 걸 간직하기 위해_거짓말

2023 12 30 sat

너에게


눈이 온단다.


눈이 오면 연락해 주는 친구가 있단다.

생일이면 문자 해 주는.

스무 살 신입생, 동아리방에서 만난 친구야.

쉰둘이 되도록 한 번도 그 친구 생일을 챙겨 본 적이 없는데

나는 꼬박꼬박 그 친구의 축하를 받고 있지.


난 네 생일을 챙겨주었는지...

축하한다고 말해 주었는지...

난 의외로 그런 것을 챙길 줄 모르는 사람이어서

널 챙겨주지 않았을 것 같아...

아, 30년만큼의 축하를 너에게 보내줄 수만 있다면.


펑펑 눈이 왔어.

포털에 보니 1981년 이후 12월에 온 눈 중 가장 많이 왔대.


나...

괜찮아...

그 사람이 너라고 해도. 또는 아니라고 해도.

물론 그 사람이 너이길 바래.

하지만 아니라고 했으니까. 아니라고 놓아야 하는 거 알아.

그런데 너를 닮은 그 사람.

종종 들어가 보게 돼.

너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 사람이 너면 너무 좋겠다 하고.

그 사람 행복해 보여서. 너였으면 해.


나 오늘 그 사람 sns에 가봤어.

그 사람도 자주 sns하는 건 아닌데.

2일 전에 새 피드를 올렸더라...

"때론 그때가 그립고 간절해."

라고 타이핑한 글자.

연말이니까 그렇겠지.

그래도 그게 나에게 선물 같아.

'너'가 아니라는데. 너의 편지 같아. 너 같아.

내 눈물은 내 마음보다 빨라서 또 주룩 눈물이 나서

화면이 흐려지더라.

그 사람이 너라면. 너는 나에게 처음으로 거짓말을 하는 거네.

그래도 나는 기쁠 텐데.

내 이름. 봤으니까.

네가 평생 부를 이름. 내가 봤으니까.

그러니까 그 거짓말도 기쁠 건데. 


그리고 네가 아니라면. 

나는 너를 찾아야 하지.

열심히. 아주아주 열심히. 찾고야 말 거야.


네가 나한테 올 수 있도록.

내가 길을 만들어 줄게.


우리는 이제 두려워할 시간이 많이 없어.

난 여전히 두렵지만.

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아니까.

누가 뭐라든 그러든가 말든가 할 수 있어.

나는. 우리의 우정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이제 와서. 많이 늦었지만.

내가 마주한 나의 진심을 소중히 여겨줄 거야.

우리가 숨겨온 우리의 작고 여렸던 우정을.

"얘들아, 그건 별 게 아니었단다. 

너희의 우정은 몹시 깨끗하고 귀한 것이었단다."라고 말해주고 싶어.

난 이제 어른이니까.

그때로부터 30년도 더 살아냈으니까.


너를 만나서 너랑 뭐 할 거냐고?

이런 겨울날 따뜻한 방 안에서 귤 까먹으며 이야기하고 싶어.

남은 날들 기쁘게 힘내서 살아내자고.

그러다 귤껍질 너한테 던지면서 

"너 그때 왜 그랬어?!"하고 원망할 거야.

또 "그때 그렇게 해서 미안해."라고 사과할 거야.

그게 다야.

비 오는 날 너한테 전화해서

"같이 전 부쳐 먹고 싶다."라고 할 거고.

가을엔 "단풍 봤어? 같이 북한산 가볼래?"라고 하고

더 좋은 날엔 "우리 여행 갈까? 치앙마이 너무 좋았는데.

피렌체 못 가봤는데. 미국 싫지만 구겐하임 미술관 보고 싶어.

너랑 에어즈락 다시 가볼까?

그런 말 해보고 싶어.


우린 각자 사느라 바쁠 테고

서로 자주 볼 수도 없을 거야.


그런데도 너를 만나고 싶어 해서 미안해.

네가. 그때를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네가 거짓말하는 거라면

용기를 내줘. 아니면 나를 불쌍하게라도 여겨주면 좋겠다.

너한테 용서할 게 생긴다면

나는 기쁠 거야.

너한테 용서해 달라고 할 것 밖에 없는 나니까.

너의 거짓말도 기쁠 거야.


아니라는데, 털어내지 못하고

연연하는 나를. 부끄러워하게 될까...

너라고 생각하게 되는 그 사람에게 마음으로부터 사죄하는 나는

나중에 너에게 웃으며 심술을 부리게 될까...


눈이 많이 왔고

나는 오늘을 가족들과 즐겁게 보냈어.

그래도 지금은 너에게 또 긴 편지를 쓰며 울고 있지.


그리고 또 일을 할 거야.

나는 주말, 공휴일 그런 거 없어.


오늘의 눈이 너를 기쁘게 했기를.

그리고 너를 만날 수 있기를.

나는 중년의 나를 너에게 보이는 게 그렇게 가벼운 마음은 아니야.

그런 모든 걸 불구하고 너를 만나려는 거야.

이게 나에게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 

너는 꼭 참작해 주길 바래.


안녕, 진짜 일을 해야겠다. 진짜 일하기 싫어...


2023 12 30 토


너의 지현으로부터


p.s. 더 소중한 걸 간직하기 위해 소중한 걸 놓아줘야 할 때가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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