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 이야기
1.
어릴 적 할머니 집 뒷동산에는 무덤이 하나 있었다.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은 어린 우리들의 최종 결승점이었다. 동네 골목을 헤집고 달리던 아침 운동은 언덕에서도 가장 높이 솟은 무덤의 정점에서 마무리되었다. 철이 들어 무덤의 의미를 알고 나서는 봉분 위에 올라서는 일은 없어졌지만, 기억 속의 그 무덤은 벅찬 숨을 고르던 종착지로 남았다.
살면서 숨이 차고 허덕일 때면 봉분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던 그 시절의 풍경이 담긴 액자를 꺼냈다. 마을의 올망졸망한 지붕들과 동그란 연못을 둘러싼 고목들, 초입 길을 드리우던 버드나무와 뒤로 펼쳐진 짙은 초록빛 들판을 떠올렸다. 이 유년의 풍경은 지치고 답답한 가슴에 시원한 바람이 들게 했고, 움츠러진 어깨와 쪼그라든 마음을 펴게 하는 가장 젊은 스케치이자 저문 날의 소묘 같았다.
2.
“이 골짜기에 시집와서 결국 이 산기슭에 묻히는구나.”
집안의 종부인 큰어머니의 장례가 치러지던 4년 전 그날, 친척들은 한 세대의 황혼이 저물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화장과 납골당이 자리 잡은 장례문화로 인해 마련돼 있던 선산에 매장하는 것도 어렵게 겨우 모실 수 있었다고 했다. 깊게 판 땅바닥으로 관을 내리고 흙으로 덮어 봉분을 도톰하게 쌓아 올리는 의례가 진행되었다. 이제는 함께 할 수 없는 곳으로 돌아가신 부모의 마지막을 절감하는 자식들의 애끓는 회한과 생전을 함께 나눈 고인에 대한 애도가 이루어지던 한 생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이후로 그 산기슭을 비롯해 땅에 묻힐 수 있는 시대는 막을 내린 듯 더는 선산에 모시는 산소를 볼 수 없게 되었다.
그해 세상을 휩쓸었던 코로나 19는 우리 삶과 일상을 통째로 ‘변혁’시켰다. 친척들은 물론이고 가족들조차 한자리에 모일 수 없었고 차례나 제사는 최소한의 직계가족만 모인 가운데 조촐하게 올려졌다. 연로하신 어르신들의 부고가 연이었지만 그날처럼 산소에서의 장례로 마지막을 배웅하는 모습은 시간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3.
신라의 고도인 경주는 시내 한가운데에서 고분을 볼 수 있는 도시이다. 중심가에 자리한 봉황대와 대릉원은 도심 속 공원으로서 산책로나 휴식공간으로 자리 잡았고 청춘들의 데이트코스로 각광 받는 관광지로 꼽힌다. 나들이 나온 가족들이 기념사진을 찍거나 고분을 배경으로 다정한 포즈를 취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무덤 사잇길에서 연인들이 인연으로 맺어지고 새로운 사랑이 싹튼다. 삶과 죽음이 이토록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무덤의 풍경에 외지인들은 아연실색한다. 그러나 죽음을 너무도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고분 사이에서 찾는 생의 의미가 더욱 명료해질 수밖에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하리란 생각이 든다.
권력자의 위용을 과시하는 거대한 능의 높이만큼 무덤 안에서 쏟아져 나온 황금유물들은 휘황찬란하다. 죽은 이를 태우고 승천하기를 바랐던 천마도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 전체를 금빛 장신구로 치장한 무덤의 주인이 편안한 내세와 영생을 얻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 또한 홀로 갈 수밖에 없는 외로운 길을 떠났다는 것, 영원한 생에 대한 간절한 기원과 욕망으로 가득 찬 눈부신 염원에도 불구하고 만난 사람은 반드시 헤어진다는 것이다. 회자정리(會者定離)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의 생은 결국 이별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육신의 마지막 안식처인 무덤의 봉분은 온몸을 다해 우리 삶의 유한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상념을 뒤로하고 존재함으로 사라짐을 말하는 오래된 무덤 사이를 그저 말없이 걷는다.
오늘의 사람들은 옛사람의 무덤 앞에서 초록빛 잔디와 한여름의 태양을 견뎌내는 배롱나무꽃을 배경으로 생의 찬란한 순간을 남긴다. 산처럼 굽이진 능 사이로 변함없이 해가 솟고 노을이 지고 달이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