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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트너 Feb 04. 2022

파레이돌리아_01

단편소설

피아노 학원 수업이 끝나고 은행 건물 앞 사거리에 앉아 있었다. 정근이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몇 년 사이 가장 더웠던 여름이라 모두의 옷차림이 가벼웠다. 어머니는 개화기 선교사인지 철학자인지 아무튼 적당한 위인의 이름을 가져온 의류 브랜드에서 가장 알록달록한 색깔의 옷을 내게 입히셨다. 사람들은 남색과 노란색이 알맞게 줄무늬를 형성하고 있는 셔츠에 짧은 녹색 바지, 반 스타킹을 한껏 올려신은 열 살 남자아이를 불쑥 쳐다보고 지나가곤 했다.


목욕 바구니를 든 다섯 명의 누나들도 내 앞을 지나가며 나를 바라보았다. 무리 중 가장 앞에 있던 누나는 막 씻고 나온 듯 했지만 입술에 갈색 루즈가 칠해져 있었고, 배를 한 껏 드러낸 탱크탑을 입고 있었다. 어쩐지 무섭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고 있자니 톡 쏘는 한 마디가 들려왔다.


- 야!


순간 명령을 전달받은 병사처럼 누나들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 채 사이소~!


멍하니 눈을 꿈벅 거리고 있는데 어느 새 누나들은 쿡쿡 웃으며 저만치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들은 길 건너 후미진 골목 안으로 들어갔는데 좁은 골목 입구에 형형색색의 가리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익숙한 손놀림에 걷힌 가리개들이 반동에 출렁이는 모습은 요란했다. 녹색, 노란색, 남색의 줄기들이 한참을 흔들리고 나면 누나들은 없었다. 


- 너 뭐 보냐?


익숙하게 나를 꾸짖는 건 정근이었다. 태권도 학원을 마치고 도복차림으로 달려온 그는 발로 피아노 학원 가방을 툭툭 건드리며 미소지었다. '짜식-' 하면서 위 아래로 나를 훑어보는 그 얼굴에는 모종의 음흉함이 있었다. 너도 이제 궁금할 때가 되었구나, 그래도 절대로 발을 들여서는 안된다, 지난 번에 모르고 들어갔다가 어떤 할아버지한테 크게 혼이 났다, 함께 집에 가는 동안 정근이는 가리개 너머 공간에 대해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동갑이었지만 그는 언제나 나의 형이었고 선구자였다. '슈퍼 그랑죠'의 주문이나 팽이치기에서 쉽게 이기는 법은 물론, 귀신을 만났을 때 장미 가시를 코에 붙이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이나 어느 만화책 몇 페이지를 펼쳐야 비키니 입은 여자 주인공을 볼 수 있는지를 일찍이 알고 있었다. 정근이는 이미 가리개 너머 골목의 세상이 어떠한 생리로 작동하는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짜식-' 하면서 나를 훑어보는 그 눈에는 일종의 우월감도 담겨 있었다. 나 보다 다리가 훨씬 길었고, 밖에서 많은 시간 뛰어놀아 피부가 검었으며, 모든 종류의 성징과 자극을 먼저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격은 충분했다. 


- 전봇대까지 달리기 하자.


말이 끝나자 마자 언제나 먼저 출발하는 정근이의 뒤를 나는 힘겹게 쫓아갔다. 운전을 못하는 사람은 진입할 수 없다는 농담을 할 정도로 가파르고 굽이진 언덕 꼭대기 부근에 각자의 집이 있었다. 소나티네와 피아노 소곡집이 담긴 피아노 가방은 그날 따라 무거웠다. 누나들이 사라진 그 골목 일대를 '텍사스촌'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나중에 중학생이 되어 알게 되었다. 미국의 텍사스 주는 삼각형 모양인데 텍사스촌이라 불린 구역이 유사한 삼각형 형태라서 그렇게 불린다는 것은 더 나중에 들은 사실이다. 정근이는 그 날도 나보다 전봇대에 먼저 도착했다. 머리가 복잡했던 나는 뛰는 동안 땀을 너무 많이 흘렸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알록달록한 셔츠와 바지를 벗어 세탁 바구니에 넣었다. 매미 울음 소리가 들려오는 한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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