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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트너 Feb 05. 2022

파레이돌리아_02

단편소설

이사를 온지 5년 가까이 되었지만 내 방은 여전히 낯선 느낌이었다. 일단 사면(四面)이 온전히 벽으로 둘러쌓여 있지 않았다. 한 쪽면은 곧장 베란다로 통하여서 제법 거대한 창문들과 시멘트의 거친 단면이 드러난 난간이 그대로 노출된 상태였다. 본래 베란다로 활용할 공간에 방과 다른 색의 장판을 깔고 하얀 미닫이 문으로 경계를 알맞게 나누어 별도의 놀이 공간을 만드는 것이 부모님의 계획이었다. 실제로 이사 초반에는 잠시 목적에 맞게 활용되기도 했다. 장난감이 담긴 바구니를 놓고 마음대로 놀아보라는 어머니 말씀에 태엽장치 자동차를 이리저리 굴려보기도 했고, 레고 조각들을 쏟아놓은 뒤 유령의 성을 완성시키기도 했다. 일부러 만들어주신 공간이니 만큼 초반에는 성실하게 이용하려 애썼다. 어느 날인가 혼자 고무공 하나를 가지고 의미없는 토너먼트 게임 같은 것을 하고 있는데 부엌에 계신 어머니가 아무것도 하기 싫은 여인처럼 앉아 애처롭고 깊은 눈빛으로 날 조용히 바라보셨던 날이 있었고, 나는 그 이후로 놀이 공간을 잘 이용하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 집은 군살 붙듯 애매한 살림이 늘어갔다. 버리기에는 아깝고 두자니 번거로운 모든 짐들을 부모님은 보자기나 플라스틱 바구니에 넣어 두셨고 그들은 결국 운명처럼 놀이공간을 차지 하게 되었다. 채 일 년이 못되어 방과 놀이공간을 나누던 미닫이 문은 철거되었고, 내 방은 잡스러운 짐들이 쌓인 유사 베란다 공간에 일반적인 방의 형태가 실로 기묘하게 결합된 모습을 하게 된 것이다. 공부를 위한 책상은 미닫이 문이 지나가도록 길게 뻗어있던 문턱 위에 놓여, 나는 앉을 때 마다 의자의 한 쪽 다리를 돌출 부위에 올려놓고 덜컹거리는 감각을 즐기며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 따위에 매진했다. 그런 상태로 해법수학 문제집의 응용문제 를 쳐다보고 있어봤자 풀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응용문제라는 글자 옆에 문제가 어려워 울고 있는 아이들의 그림이 삽입되어 있는 것을 보며 그 가학적 센스에 쿡쿡 거리다 그저 창 밖만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창 너머 멀리 보이는 어느 거대한 담벼락 부근에서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희끄무레한 사람을 발견한 것도 비슷하게 흘러가던 나날들 중 하루였다. 초등학교 5학년 2학기가 막 시작되었을 무렵이었다. 

 


우리집은 연립주택의 3층이었다. 창 밖을 보면 너른 산등성이에 마당 딸린 단독주택이나 2~3층짜리 빌라 혹은 단층으로 된 집들이 많이 내려다 보였다. 집들 사이로는 아무렇게나 자꾸 구부러진 길들이 놓였고, 산 정상에는 같은 이름의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사람은 건물 2~3층 정도 높이의 고등학교 외벽 앞에 있었다. 어두운 밤이었음에도 형체가 또렷했다. 텅스텐 가로등의 은은한 빛이 내려앉아 그 모양의 경계도 확연했다. 그는 그야말로 하얀색 강보(襁褓)같은 망토를 머리까지 뒤집어쓴 채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움직임도 없었다. 먼 곳에 있어 눈, 코, 입이 어떻게 생겼는지 파악이 어려웠지만 그 형체가 사람이라는 것은 너무나 명백해보였다. 환락의 도시 고모라를 떠나며 물질 욕심에 뒤를 돌아봤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버린 롯의 아내가 과연 저러한 모습이었을까. 그인지 그녀인지 모를 사람을 한참 바라보던 나는 별안간 파고든 공포감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나무결이 살아 있는 가구나 화재 현장의 검은 연기 속에서 대충 윤곽이나 음영을 짜맞춰 구체적 형상으로 인지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보를 뒤집어 쓴 저 사람은 아무리 마음을 고쳐먹고 바라보아도 사람, 그냥 서서 뒤를 돌아보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채 판박이처럼 저 멀리 머물러 있는 사람. 저것은 귀신일까. 어쩌면 내게만 나타나는 정령, 정체가 무엇이든 요사스러운 초자연적 존재가 아닐까. 부모님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보지 못하실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저 애처롭고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시며 나를 쓰다듬으실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보다는 정근이에게 말하고 싶었다. 정근이는 저 하얀 사람을 겁내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다. 어쩌면 어떻게 퇴치해야 하는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끝없는 상상과 걱정 속에서 일찍 불을 끈 나는 사타구니 사이에 손을 찔러넣고는 아기처럼 웅크린 채 잠이 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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