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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트너 Feb 07. 2022

파레이돌리아_03

단편소설

이틀 뒤에 정근이를 만났다. 그 날은 야구를 가르쳐 주겠다며 글러브를 끼고 나왔고 야구공과 배트 대신 테니스 공과 각목을 가져왔다. 정근이가 하도 부산스레 룰을 설명하는 통에 희끄무레하고 괴기스러운 존재에 대해 설명하려 했던 것을 잊어버렸다. 같은 자리에 어쩌다 놀던 동네 친구 세 명이 더 있었는데 정확히 얼굴이나 이름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 날 해가 질 때까지 열심히 배트를 휘둘렀지만 나는 한 차례도 공을 맞추지 못했다. 익숙한 상황이었지만 그 굴욕감은 익숙해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어설픈 다섯 소년이 하는 공놀이가 지리했던 정근이는 어제 있었던 미스코리아 대회를 봤느냐며 딴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기가 보기엔 진보다 선이 예쁘다는 둥, 미는 성형수술을 했다는 둥, 입상 서열 가운데 미스 태평양이 꼴찌라는 둥 사사로운 이야기를 지식 자랑 하듯 늘어놓았다. 분명히 나도 부풀어진 머리에 왕관을 머리에 쓰며 눈물 흘리던 여자들을 보았지만 정근이가 기억하는 것들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입술 색깔이 아주 붉고 예뻤다는 인상 뿐이었다. 미스 코리아를 소재로한 대화는 금세 방탕하게 흘러갔고, 나는 그 날 정근이의 입을 통해 섹스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 섹스가 어떻게 하는 건 줄 알아? 남자 거기랑 여자 거기랑 서로 비비는 거야.


아이들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귀신같은 형상이 나타나는 문제의 골목에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기심이 웬만한 공포를 이겨낸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베일 따위를 뒤집어 쓴 채 밤마다 섬뜩하게 나를 바라보는 유령의 실체가 돌연 사무치게 궁금해졌던 것이다.


내 방 창문에서 보이는 하얀 담벼락이 세워진 길은 아이들과 놀던 곳으로 부터 멀지 않았다.  담쟁이 덩굴이 무성한 이 층짜리 벽돌집을 끼고 돌면 바로 그 골목이었다. 한 걸음씩 골목 안 쪽으로 진입할 때 마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더 어둡고 깊은 길의 끝에 도달하고 싶었다. 얼마쯤 가다보니 저 앞에 막다른 지점이 나타났다. 그 때까지 아무런 형상도 보이지 않았다. 하얀 담벼락으로 막힌 끝까지 가봐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숨을 한 번 고르고 전진하던 순간, 갑자기 어느 집 처마에서 날아오른 제비가 내 곁을 잽싸게 스치며 지나갔고 깜짝 놀란 나는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줄행랑을 놓고 말았다.


그 날 밤은 잠이 오지 않았다. 사타구니 사이에 손을 찔러넣고는 아기처럼 웅크리고 있었지만 내내 정신이 맑았다. 밤벌레 우는 소리를 들으며 천장과 벽을 잇는 갈색 몰딩을 따라 눈알을 굴리고 있는데 어쩐지 정근이가 섹스는 비비는 것이라고 말했던 게 계속 생각났다. 그러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편안했던 내 두손이 예민하게 거슬렸다. 어느 새 난 속옷 위에 손을 밀착시킨 채 이렇게 저렇게 물건을 비비는데 열중하게 되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학습된 것처럼 몸이 반응했다. 그리고 몇 분이 채 되지 않아 발가락이 빳빳히 젖혀지는 아찔한 쾌감을 느끼며 몸이 꽝하고 얼어붙었다. 비빈다는 것이 과연 이런 것이었구나. 인생 첫 자위행위의 충격은 꽤나 얼얼한 것이었다.


바로 잠들지 못한 나는 알몸으로 책상 앞 의자에 앉아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었다. 베란다 창문으로부터 찬바람이 들어와 엉덩이를 훑고 지나갈 무렵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보니, 강보를 뒤집어 쓴 귀신이 어김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형상은 이제껏 보았던 중 가장 선명하고 밝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실루엣의 경계가 마치 빛나는 것처럼 환해서 입체감은 더욱 확연했다. 이제는 무늬나 음영을 잘못 보았다고 말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정도였다. 분명 유령같은 그 형상이 맞은 편 골목 한 가운데 실재했다. 아니 이제는 살아 움직이는 귀신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 공포스러웠던 것은 있는 듯 없는 듯 했던, 형체의 표정이 두드러지게 돋아난 것이었다. 눈이 있을 자리에 눈이, 입이 있을 자리에 입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입은 미소짓는 형태를 하고 있었다. 저것이 나를 보고 웃고 있는 것이다. 심장이 널 뛰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는 벗어놓았던 속옷을 부리나케 입고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은 채 누워 눈을 질끈 감았다. 다음 날 아침은 더디게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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