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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트너 Feb 11. 2022

파레이돌리아_04

단편소설

이튿날은 일요일이었다. 아버지께서 목회일을 하셨기 때문에 일요일은 바쁜 날이었다. 평소 보다 일찍 눈이 떠져서 빨리 씻고 내려가 교회 바닥을 대걸레로 청소했다. 예배를 드리는 교회 바닥들은 왜 그렇게 습한지 걸레를 밀고 나면 물기가 오랫동안 남아 반질거렸다. 청소하는 동안은 내내 바닥만 쳐다봤다. 바닥 타일은 짙은 녹색이었는데 하얀색 줄무늬가 무작위로 뻗어있는 디자인이었다. 줄무늬는 모양에 따라 날개를 펼친 나방처럼 보이기도 했고 초현실주의 화가의 그림에 나오는 자화상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바닥을 열심히 닦으면 뭔가 좋은 일이 생기고 내가 잘못한 것도 용서를 받을 것이라 생각한 순간들이 많았다. 그 날도 마찬가지였고, 유난히 대걸레를 잡고 있는 두 손에 힘이 들어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걸어서 오 분만 오르면 험준한 절벽으로 이루어진 암릉이 나올 만큼 우리 집은 제법 높은 산줄기 어딘가에 있었다. 사층짜리 건물이 일 층은 교회, 이층과 삼층은 일반 가정집, 사층은 옥탑방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층마다 가정집이 두 가구씩 자리하고 있었는데 우리 집은 삼층이었다. 아버지가 건물의 소유주 였다. 건물을 올리기 위해 가진 재산의 거의 대부분을 소진한 것으로 기억한다. 교회 설립은 신학교를 졸업한 아버지의 꿈이었지만 십년 남짓한 역사의 개척교회 였기 때문에 성도들은 별로 없었다.



우리 집으로 올라오는 언덕길 입구에는 이미 유서깊은 대형교회가 있었는데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길다란 창문 디자인이 인상적이었다. 대부분의 동네 사람들은 대형교회로 출석했다. 피아노 학원이 끝나고 집으로 향할 때 마다 나같아도 언덕을 오르는 수고 할 필요없는 대형교회로 출석하는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가끔 그토록 애를 쓰며 경사진 길을 올라 우리 교회로 출석하는 성도님들이 의아할 때가 있을 정도였다. 그런 것이 믿음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예배 중에는 주로 맨 뒷자리에 앉아 바닥만 쳐다보고 있는 시간이 많았다. 습기 때문인지 예배당 바닥을 기는 곱등이나 귀뚜라미가 생각보다 자주 나타났는데, 그럴 때 벌레들이 어디로 기어가는지 조용히 관찰하고 있으면 시간이 금세 흘렀다. 혹 기도에 열중하시는 앞 자리 집사님의 뒷꿈치 언저리로 곱등이 따위가 더듬이를 흔들며 기어가기라도 하면 나만의 서스펜스를 즐길 수 있었는데, 불쾌한 소름이 돋는 감각을 통해 스릴을 만끽할 수 있다는 변태적인 재미가 좋았다.



예배가 종료되면 어머니가 바빠지셨다. 전문 식당에서 사용할 법한 커다란 솥에 국수를 한 가득 끓이셨고, 애호박을 정갈히 썰어 고명으로 올리시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식사 공간에 모인 성도님들은 그렇게 후끈한 잔치 국수를 저마다 한 그릇씩 드시며 대화를 나누다 집에 돌아가시곤 했다. 여러 사람 먹을 양을 준비하는데 드는 품이 상당했을테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웃으며 일을 하셨다. 잠깐이었지만 언덕 위의 작은 교회는 그렇게 사람들로 북적이던 때가 있었다.



교회에 다니는 성도님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든 것은 이 자리에 문을 연지 삼 년쯤 되던 해 부터였다. 어떤 집사님과 권사님이 서로간의 돈 문제로 크게 싸워서 분위기가 어수선한 중에 그만 나오기 시작한 사람들이 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잘 나오던 어떤 형제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사고로 손가락 세 개를 잃은 뒤 더 이상 출석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그런 이들에게 우리 교회에 나오지 않을 이유는 언덕 위를 기어코 올라와 예배에 참석해야 했던 절박함 만큼이나 확고한 것이었으리라.



어머니는 더 이상 국수를 삶지 않았고, 그 많던 그릇과 대형 솥이며 냄비들은 애물단지가 되었다. 사람들이 한참 많을 때 우리 교회에서 직접 만들었던 복음성가 책들은 몇 박스씩 남아 돌았고, 클래식 기타는 연주할 사람이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 모든 것들이 놀이방으로 쓰려다가 애매하게 내 방과 합체가 되어버린 베란다 공간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어머니는 국수 대신 근처 시장에서 가장 값싸게 살 수 있는 크림빵과 단팥빵 따위를 몇 봉지 구매해서 점심으로 제공하셨고, 몇 개 되지 않는 그 빵 마저 남아도는 날이 많아졌다. 어린 나이였지만 가세가 기울고 있다거나 부모님의 절망이 나날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침몰하는 배 위에 올라타고 있는 승객들 같았다. 어느 토요일날, 빵을 사러 어머니와 함께 시장에 다녀와서 익숙하게 빵들을 냉장고에 정리하고 있는데 거실 식탁에 앉은 어머니가 아무것도 하기 싫은 여인처럼 앉아 그런 내 모습을 애처롭고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예전에 보았던 그 눈빛이었다. 어머니는 어쩌면 그 당시에도 아버지와 함께 관리하고 운용할 교회의 앞 날이 어떻게 될지 대략 알고 계셨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의 놀이공간이랍시고 만든 그곳의 용도가 실패의 흔적같은 잡기들을 쌓아놓는 창고가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마저 느끼셨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함께 언덕 꼭대기에 올라와 집을 짓고 교회를 세우고 몇 년 동안 애호박을 정갈히 썰어 올리셨으니, 그런 것이 믿음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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