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와 가사 시리즈
올해 라식 수술을 했다.
안경을 쓰고 살아온 지 28년이 넘었으니, 일종의 대변혁을 야기하는 수술이었다.
진단부터 수술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삶에서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 일의 흐름이었다.
겁도 많고 고민도 많은데 게으름도 잘 피우는 입장에서
이렇게 큰 이벤트가 별 갈등 없이 이루어진 게 신기할 따름이다.
한 달 반 정도 지난 지금, 안경 없이도 세상을 잘 보고 있다.
안경 하나 벗는 일이 별 일 아닌 것 같으면서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것 만큼이나 대단한 사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예전에 명동에서 라식 수술을 반대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안경점 사장이었다.
안경테를 바꾸러 갔었는지 렌즈를 사러 갔었는지 기억이 정확하지 않지만,
사장은 라식을 반대했다. 안경을 팔아야 하는 입장에서 자연스러운 주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그는 일찍이 라식 수술을 한 사람이었다.
수술을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과도한 빛번짐 때문이라고 했다.
밤에 운전하다가 신호등을 볼 때 불편감이 따를 만큼 불편하다고 한다.
라식 수술, 정확히는 좀 더 고가의 스마일 라식을 하고 적응이 되고보니
정말 밤에 가로등을 볼 때 빛번짐이 상당하다.
기본적으로 렌즈 포커스가 약간 나간 화면처럼 보이는데,
빛의 주변에 띠가 생기는 것이 달무리를 보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심지어 빛의 주변으로 무지개가 보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빛은 그대로 아름답다.
무지개가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사실 밤에 보이는 무지개는 꽤 예쁜 모습이다.
그러다보니 가끔은 번지고 뭉개진 빛들을 보면서 사는 것도 나름 괜찮은 일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렌즈로 무언가를 촬영할 때 심도가 얕으면 초점이 맞는 범위가 좁아져서
어떤 대상을 포커스 아웃된 상태로 그려내기 수월해진다.
루치노 비스콘티의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의 마지막 시퀀스들에 나오는,
아련하게 번지는 바다 물결의 빛방울 같은 것들이 구현되는 거다.
지각자에게 다가오는 번져버린 빛들은
때로는 확실하지 않은 것을,
지나가버린 것이나 잡을 수 없는 것을,
정확하지 않은 형체를 상상하게 만드는 힘따위를,
어둠 속에서 빛이 필요한 이들의 고된 상황 따위를 떠올리게 하며,
그로부터 정서를 끌어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자정 넘어 막차 버스에 몸을 싣고
속절없이 지나가는 수백개 가로등의 수백개 무지개를 응시하며
노래를 한 곡 재생시킨다.
번져서 퍼져나가는 빛들처럼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을 노래하는데,
너무나 조용히, 그 어떤 격정 없이 부르는 바람에 더 슬프게 각인되는 곡.
그 자신 활화산 같은 창법으로 한국의 로버트 플랜트라는 별칭을 얻었지만,
이 곡에서 만큼은 모든 것을 흘려보내듯이 노래한,
김종서의 <다시 비가>를 듣는다.
한참을 마주 앉아 아무런 말없이 모르는 타인처럼 느껴지던 너
이별을 말하려던 차가운 네 입술 내리는 비와 눈물 사이로 흐려지던 너의 뒷모습
아무런 준비도 없던 나에게 그렇게 냉정히 떠나버린 너
내곁에 남겨진건 낯설은 외로움 그리고 아무 기다림 없는 홀로 남은 아픈 그리움
아무런 준비도 없던 나에게 그렇게 냉정히 떠나버린 너
내곁에 남겨진건 낯설은 외로움 그리고 아무 기다림 없는 홀로 남은 아픈 그리움
다시 비가 내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