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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트너 May 04. 2022

우리 스무살 때

노래와 가사 시리즈

주기적으로 등산을 한다.

재작년부터 시작해 지금은 한 달에 2~4회 정도 꾸준히 해 나가는 취미가 되었다. 

어떤 결심이나 대단한 마음 가다듬기 같은 건 없었다.

지내다보니 나뭇잎에 단풍 들 듯 조금씩 이끌렸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등산화를 신은 채 정상에서 인증샷을 찍고 있었다.


일 년 정도 산을 다니다 보니 일행이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최근엔 서울에 있는 야트막한 산을 다섯 사람이 함께 다녀왔다.

몇 시간 동안 땀 흘리며 걷고 하산한 동네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는데,

그 날 새로 합류한 일행 가운데 한 형님이 '밥이 너무 맛있다'며 잇따라 밥맛을 찬양하셨다. 

감동에 얼굴까지 붉게 달아 오른 형님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자니 말씀 하시길

'나이가 드니 밥맛이란 게 자꾸만 없어지고, 뭔가를 먹고 나서 참 맛있다고 느낀 것도 너무 오랜만' 이라서 벅차 오르셨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나이를 먹는다. 

함께 산행을 한 이들의 평균 나이는 39.4세 였다. 

시간이 흐르는 것은 나뭇잎에 단풍 들 듯 자연스러운 일이고

정신을 차렸을 때 어느 덧 산 정상에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것처럼 아찔한 순리다.


한 그릇의 밥과 바지락 맑은 국에 감동하는 건,

작은 행복 하나를 찾는 것의 숭고한 가치를 생각할 만큼 지난한 경험의 터널을 지나온 우리가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그만큼 터널 안에서 많은 것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도 되어서

'밥이 너무 맛있다'는 학형의 말은 뿌듯한 동시에 서글프게 다가오기도 한 것이었다.





바쁜 일은 한 꺼번에 몰려오는 법이다.

4월 말 부터 해야 할 일들이 켜켜이 쌓이더니, 어제부터는 독촉이 전달되기 시작했다.

가만히 노트북 메모장에 이번 주 동안 해야 할 일을 작성해 보았다.

작고 세세한 업무까지 포함하자면 대략 열 개 정도되는 일들을 정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업무의 내용들을 가만히 살펴보니, 소위 말해 내게 돈 되는 일은 한 개 두 개에 불과했다. 

그 마저도 내게 올 유익의 정도를 담보할 수 없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전망의 일들 뿐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일들이,

이십대 초반 시절을 보내고 있는 나였다면

시키지 않아도 재미를 느끼며 했을 법한 일 들이라는 것이다.

터널을 지나는 동안 내게 달라붙어 있던 재미와 흥미라는 것은 다 떨어져 나가고 없는 지경이 되었으니 애석할 따름이라고나 할까. 그저 처리할 일의 순서나 이리저리 맞춰보며 실속 없는 업무로 스트레스 받지 않기를 궁상맞게 기도할 수 밖에 없다.



*



햇살이 좋은 하루, 일들을 처리하러 가는 길에

시내버스 맨 뒷자리에 흔들거리며 앉아 가만히 잡생각 해본다.


스무살 그 때는

마로니에 공원 파랑새 소극장 건물에 덮인 담쟁이 덩쿨 흔들리는 꼴만 봐도 행복했던 것 같다.

야간 작업이 끝나고 자정 가까운 시간에,

보이지도 않는 한 구석에서 어쿠스틱 기타 반주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던 순간이 사무치는 기억으로 남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때다.


결국은 산을 다니고,

여러사람과 함께 땀흘리는 경험이 좋아지고,

별안간 밥이 맛있고,

잃어버린 것들을 자꾸 생각하고,

갑자기 행복을 찾으려 작은 나를 생각하는 시간들이

남은 날 동안 이어질 것을생각하니

그 또한 아찔하면서도 한 켠으로는 생각외로 재미있는 과정 아닌가 위로하고 마는 것이다.



*



스무살 그 때는... 하면서 청승 부리기 좋은,

When We Were Young 의 정서로 뭉쳐 있는 곡들은 많지만

나는 마로니에 공원을 떠올렸던 시내버스 뒷자리에서

김건모의 목소리를 생각했다.


명반이라는 수식 자체가 지루할 만큼 전설적인 2집.

그 가운데 가사를 자꾸만 곱씹게 되는 수록곡.

'우리 스무살 때'를 듣는다.


팔분의 육박자 블루스에,

간결한 문장들.

후렴으로 향해 갈 수록 상승하는 음정 만큼이나 격정적인 가사와 균형 잡힌 셈여림.

깨끗하게 공명을 때리는 보컬 사운드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를 만큼 흐뭇한 곡이다.


가사에 나오듯 지나간 모든 시절은 참

손뼉을 치면 닿을 것만 같은 순간들이다.

그 때 만났던 사람들 이름조차도 잊혀져 가지만.



*



언젠가 비오던 날.

이 거리는 술잔에 흔들렸고.

떠나는 그대는 바람이었어라. 바람이었어라.

나는 보았네. 그대 두 눈에 가득 고인 눈물.

할말도 못한 채 돌아서야 했던 바보같던 시절.


사랑하나 못하면서 

사랑을 앓던 시절.

손뼉을 치면 닿을 것 같은

스무 살 시절의 추억.


먼 훗날 그대 이름조차도

잊혀질지라도.

어딘가 남아 있을 듯 한

그 때 우리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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