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콜콜한 이야기
1
몇 년 전,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수업을 진행한 적이 있다.
단편영화를 찍는 수업이었다.
구성원들이 모여 작가부터 배우까지 역할을 정하고, 다같이 모여 영화를 찍는 일련의 과정을 짧은 시간에 수행해야 했다.
방송통신대학교를 다니는 사람들은 나이도 경력도, 이 학교를 다니는 이유도 제각각이었다.
각자 지닌 감수성이 이다지도 다를까 싶을 만큼 다양한 수강생 분들이 모여 있는데,
그런 우리가 한 팀이 되어 워크샵을 해야 한다니. 지도하는 입장에서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걱정은 기우였다. 수강생 분들의 융합은 생각보다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역할을 나눌 때 부터 작가/연출을 하고 싶은 사람, 배우를 하고 싶은 사람, 촬영을 하고 싶은 사람이 제각기 나타나 분담이 상당히 빨리 이루어졌다.
워크샵에 집중할 여력이 되는 사람, 개인사로 분주한 사람들이 서로의 사정을 이야기하며 참여 방식을 정하는 과정에서도 얼굴 붉힐 일이 없었다.
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수강생 분이 계셨는데, 당시 한국나이가 일흔인 분이었다.
그 분은 영상 창작과 관련하여 수학한 적은 없지만 팀으로 진행하는 워크샵에서 어떻게든 쓸모 있는 스탭이 되고 싶어 하셨다.
어르신이니까 다소 편한 포지션을 드리려 해도,
더 많은 일을 찾아서 하기 위해 애쓰는 분이셨다.
촬영은 1회차였고, 대학로 캠퍼스에서 하루 종일 진행했다.
처음에는 손발이 조금 맞지 않았지만 금세 모두가 자신의 롤에 적응했다.
삐걱거릴 것을 예상해서 촬영을 시나리오 순서대로 진행했는데 그게 도움이 되었다.
감독도 배우도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어렵지 않게 적응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촬영장 전체를 살피는 일종의 슈퍼바이저 프로듀서가 되어 실시간 멘토링을 했다.
그리고 수시로 그 고령의 어르신을 살폈다.
마음이 꽤나 쓰였다. 일흔의 나이에 하루 종일 - 실내이긴 했지만 겨울 촬영이었다 - 워크샵 현장에서 움직인다는 것은 고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분은 촬영이 진행되면서 점차로 남들이 하지 않는 일, 손이 비는 일을 찾아 하기 시작하셨다.
대표적인 것이 조명이었다. 우리는 배우와 카메라, 연출의 협업이 잘 이루어지는 편이었는데, 조명의 설계는 한 발 늦게 따라오는 현장이었다.
촬영 스팟을 정하고 샷의 운용 방식을 픽스하면 그 다음에 조명을 고민하는, 혹은 큰 고민 없이 주광과 측면 조명을 삼점 시스템에 맞게 설치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보니 누군가는 A스탠드를 옮겨야 했고 위치를 잡아야 했는데 그게 한 발씩 늦게 진행됐다.
그리고 촬영의 중반 쯤 되었을 때 조명기 달린 A스탠드를 가장 많이 들고 움직이는 수강생은 바로 그 일흔의 만학도였다.
나중에는 조명감독처럼, 조명기가 놓이면 딱 좋을 위치에 알아서 갖다 놓을 정도로 상황을 분석하며 일을 하셨다.
끝나고 여쭤보니 촬영을 하면서 자연스레 학습이 되어 나중엔 이쯤 조명기를 놓으면 괜찮지 않을까 스스로 판단해 스탠드를 옮겼다고 하셨다. 나는 그 모습이 참 감명깊었다.
촬영이 끝나고 차를 마시며 어르신께 감사를 표현했다.
그러자 어르신은 나는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좋다, 힘들지 않다 하셨고 조명기를 들고 나르는 것이 재미있었다고 덧붙이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남으면 남았겠어요. 10년 좀 넘게 남았으려나. 빛이 필요한 곳에 조명 비추는 일을 하니까 재미 있었습니다.”
뭉클했다. 곁에 앉았던 다른 20대 수강생 분도 울컥하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은 각자 지나온 시간들로 체계화된 우주를 갖고 있을 것인데, 우리 모두는 그 분이 가진 우주의 깊이와 넓이를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몇 년이 흘렀지만 고요하게 흘러간, 그 때의 차 마시던 시간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2
며칠 전 부모님과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여드렸다.
영화는 <국보>, 극장은 광화문 씨네큐브였다.
부모님은 60년 이상 서울에 사셨고 사대문 안 쪽 지리에 밝으신 분들이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누나와 나를 광화문 교보문고나 세종문화회관에 데리고 다니셨다.
연로하신 부모님과 오랜만에 광화문 근처 나들이를 하면 옛날 생각도 나고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아 극장을 광화문으로 선택한 것이다.
씨네큐브 근처에는 새문안교회가 있다.
새문안교회는 1887년에 선교사 언더우드가 설립한 대한민국 최초의 장로교 조직교회이다. 거의 문화유산에 가까운 기독교 사적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오래된 건물을 헐고 리모델링 하여 지금은 몹시 호화로운 신식 빌딩이 되었다.
목회일을 하셨던 부모님이 달라진 새문안교회를 보시면 그 감상이 남다르실 것 같아 일부러 그 앞을 지나치며 달라진 교회를 함께 구경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빠는 한동안 거대해진 교회를 빤히 바라보시더니 옛날 기억 하나를 꺼내셨다.
“내가 중학교 졸업식을 새문안교회에서 했었는데…”
그 때 아빠의 시선은 먼 과거 어디쯤에 닿아 있는 듯 아득해 보였다.
그게 몇 년전 일이냐고 내가 물었고, 아빠는 한참 계산하더니 57년 정도 되었을 것이라 하셨다.
아빠는 곧 지나치던 걸음을 다시 돌려 새문안교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셨다.
나는 교회 앞에 선 엄마 아빠의 다정한 모습을 핸드폰으로 찍었다.
57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는 것은, 나도 믿을 수 없고 아빠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시간의 두께를 감각한다는 게 너무 어려웠다.
아빠는 중학교 졸업식을 새문안교회에서 했다는 말을 두 번, 세 번, 자꾸 반복 하셨는데 아마도 그 긴 시간을 이해하기 위해 어떤 사실들을 계속 떠올려야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나는 그 날 이후 기억에 남는 시간들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고 있다.
기억에 남는 시간의 층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오래 전에 있었던 것이 지금도 있다는 것, 그것이 계속 존재하려면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는 것, 뭐 그런 구태의연한 생각들을 자꾸 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시간을 기록하는 확실한 수단이라는 사실 때문이라는 것, 뭐 그런 부끄러운 생각들을 새삼스레 하고 있다.
새문안교회 앞에서 아빠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빠의 기억은 어느 시간 속에 있었을까. 그 순간 만큼은 죽었던 시간들이 부활했을까.
그게 가능하다면 기억은 참 위대한 도구일 것이다.
남아있는 시간을 헤아리시던 노년의 수강생 분은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실까. 모르긴 해도 그 분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소중하게 남아 있고, 난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감동을 느낀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 정말 중요한 일 같다. 그래서 요즈음 무언가를 창작하고 그 안에 시간들을 담아서 누군가의 기억으로 뿌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또 그 일을 잘 해내고 싶다는 생각을 부쩍 한다.
내가 뭔가를 만들어서 뿌렸을 때 그것을 자신의 우주로 가져가 잘 기억해줄 사람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