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팔
요즘 통 잠과의 싸움에서 반격의 여지없이 진다. 나에게는 잠이라는 존재가 원펀맨의 싸이타마와 같다. 이기려고 해도 이길 수 없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에 대해 만족감과 성취감을 느끼는 인간인데 요즘의 나는 그냥 인간실격을 넘어선 인간탈락도 아닌 인간실패다. 안 되겠다 싶어 어제는 오전 6시 반부터 알람을 설정해 보았다. 어떻게든 잠에서 깨겠다는 의지를 내 뇌에게 보여주려고 일종의 자기 합리화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 전에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자기가 일어나야 할 시간을 삼창 외치고 그대로 잠들면 그 시간에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보았다. “뭐야 이게"라고 했지만 실제로 나는 그날 밤 부끄럽지만 정말 갈색 베개에 내 얼굴을 처박고 "7시 반! 7시 반! 7시 반!"을 외치고 눈을 감았다.
놀랍게도 7시 반에 눈을 떴다. 핸드폰은 알람 소리로 계속 울리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는 딱 이 모습이었다.
“내가 지금 일어나면 무엇이 나를 위로할 수 있지? 내가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억지로 일어날 이유가 있나. 그럼 일어나야 할 이유 3가지만 생각해 보자. 3가지만 있다면 나는 무조건 일어날 테다. 일단 난 아침에 러닝을 뛰고 가고 싶은 카페가 있었어. 그래.. 그리고 요즘 통 일찍 못 일어나서 스트레스를 받았지, 마지막은 뭐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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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을 땐 11시 30분이었다. 밝은 햇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는 욕밖에 안 나왔다.
"병신! 병신 같은 놈" 속으로 외치면서 이불을 갰다. 그 와중에 이불을 갬으로써 나는 조금 나은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우리 집은 구옥이라 뜨거운 물이 나오려면 한 3-5분 정도 기다려야 한다. 물을 틀어놓고는 3분 동안 냉장고 앞에 앉아 눈알을 꽉 누른 채로 한숨만 버억버억 쉬고 있었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것을 확인한 후 잔뜩 쌓인 빨랫감 위로 팬티를 던져두고 속죄의 샤워를 했다.
내가 사는 곳은 서울이지만 아직 예전 분위기를 품고 있는 옛날 동네라 오전 11시 반에서 12시 사이만 되면 남색 더블캡 포터트럭에 식료품을 가득 챙겨서 "계란이 왔어요~ 쪽파 2000원~" 방송을 하는 이동식 마트트럭이 항상 돌아다닌다. 신기하게도 그 시간만 되면 어디선가 어르신들이 슬금슬금 나오신다. 나는 그런 상황에 매력을 느껴 가격이 좀 더 비싸더라도 그 트럭에서 어르신들과 같이 "오늘은 뭐가 싱싱해요?" 하며 구매하는 과정을 즐기고는 했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샤워를 하는데 화장실 창문 너머로 마트트럭의 방송이 물줄기를 뚫고 오늘 계란이 싱싱하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씻자마자 머리도 말리지 않은 채 계란 한 판을 사 와서 들어왔다. 나는 간장계란밥의 간장 양념을 시오콘부의 담백한 소금 간으로 대체해서 시오콘부계란밥을 해 먹으면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아점을 준비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고 늦잠에 대한 속죄가 어느 정도 해소됐다. 식사를 마치고 기분 좋은 바람과 함께 잠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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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을 땐 기분 좋지 않은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6시의 애매한 어두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몽사몽으로 난 책상에 앉아 책 한 권을 펼치고는 10페이지도 넘기지 못하고 언제나 그랬듯 아사히 캔맥주 한 캔을 따 호소노 하루미 노래를 틀고 맥주를 마셨다.
5분 정도 지났나, 눈이 풀리길래 침대에 누워 또다시 일찍 자기 위해 눈을 감았다.
내일은 일찍 일어날 수 있을까?
오늘 난 시오콘부계란밥 말고 생각나는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