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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인형 May 25. 2023

꿈꾸지 않는 잠

다시는 볼 수 없는

가늘고 긴 목을 손아귀에 움켜쥔 지훈이가 쿵 소리가 나도록 기린 인형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기린 인형의 몸통이 바닥에 닿은 충격으로 가냘픈 네 개의 다리가 스프링처럼 허공에서 흔들렸다.  

"꽥! 죽었다."


하하하하하.....


아이들은 지훈이의 말이 우스웠는지, 아니면 힘없이 네다 꽂힌 인형의 형체가 우스웠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를 들은 주변의 다른 아이들도 지훈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이들이 몰려들자 신이 난 지훈이가 기린 인형을 들어 올리더니 처음보다 조금 더 세게 바닥에 내리꽂았다.


"꽥! 또 죽었다......"


하하하하하하...... 죽었대.


죽었어. 아니야. 눈을 뜨고 있잖아.


보람이가 흰색과 검은색 실로 수놓아진 기린의 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이들이 죽음에 대해 '누워서 눈을 감고 있는 것'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죽음에 대한 경험이 많지 않은 아이들에게 죽음이란 심각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은, 그저 '배고프다'나 '놀러 간다'처럼 형용사 혹은 동사에 불과한 것 같았다. 


......


우리 반 아이들 중, 유치원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등원하는 여자아이가 한 명 있었다.

당직선생님이 현관 번호키를 누르는 사이 누군가 다가와 옷깃을 붙잡는 바람에 소스라치게 놀라 보니 소연이 더란다. 아직은 다들 겨울외투를 걸치고 있을 3월 중순인데 소연이는 얇은 티셔츠에 분홍 카디건을 걸친 채였다.

어디서 왔나 고개를 돌려보니 소연이 아버지는 이미 몸을 돌려 승용차로 뛰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소연이가 일등으로 왔네?

아침밥 먹고 왔어?

배고프지 않아?


하얗게 튼 아이의 손등에 로션을 문지르는데 묻는 말에는 아무 대답도 않던 소연이가 꺼낸 말은 뜻밖이었다.


"우리 엄마, 금방 죽는대요."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여섯 살 소연이의 말에 당황하지 않은 척하며 최대한 평상시와 같은 말투로 물었다.

"엄마가 침대방에 있으면 못 들어오게 해요. 죽는 냄새가 난대요."

"그래? 누가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나는 소연이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지만 눈빛에 어린 아이의 감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소연의 어머니는 위암이라고 했다.

손등과 팔목에 멍이 가득한 것만 빼고는 환자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화사한 모습이었다. 오열하시면서 아이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하셨었는데. 이젠 소연이도 알게 된 걸까.

숱이 많은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커다란 눈망울이 어머니를 쏙 빼닮았다.


다음날 소연이는 내가 포니테일 모양으로 빗어서 묶어주었던, 딸기모양의 방울이 달린 머리끈이 목 뒤까지 밀리고 눌린 채로 등원하였다.

소연이를 무릎 앞에 둘러앉히고 분홍 고무끈에 엉켜있는 머리카락을 떼어 풀어내고 있는데 아이가 말했다.

"오늘은 엄마가 병원에 갔어요...... 엄마가 병원에 가면 아줌마가 와요."

"아줌마? 아줌마가 누구셔?"

"선생님, 아줌마 몰라요? 우리 엄마 친군데."

"응, 엄마 친구시구나. 소연이 돌봐주러 오시는 거야?"

"엄마 죽으면 아빠랑 나랑 셋이 같이 살 거래요."

나는 아이의 말을 듣지 못한 척하며 바닥에 떨어진 놀잇감을 몇 개 정리했다.

"선생님."

"응?"

"그런데 죽는 게 뭐예요?" 


아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얘기를 해주어야 하나. 너무 어려웠다.


"그건...... 잠자는 거랑 비슷한 거야."

"이불 덮고 누워 있는 거요?"

"응......"

"그런데 왜 다시는 볼 수 없어요?"


한 번도 힘든 감정을 이야기하지 않았던 소연이가 눈물이 그렁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잠자는 건데 왜 다시는 볼 수 없어요? 왜 아줌마가 엄마가 돼요?"


그건...... 하늘나라에...... 이곳에서는 이제 살 수가 없고...... 너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고......


나는 우는 아이를 조용히 가슴에 안았다.

아이의 슬픔이 내 마음에 오롯이 전달되었고 나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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