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수도 있는 거였네요.
그날은 사실 좀 이상한 하루였다.
전자피아노 옆에 누군가가 놓아둔 물컵을, 악기를 집으려던 아이가 건드리는 바람에 물이 쏟아지며 피아노가 망가졌고, 내가 물기를 닦는 사이 누군가가 화이트보드에 지워지지 않는 빨간색 유성 매직으로 잔뜩 낙서를 해 놓았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나간 바깥놀이터에서 우려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선생님! 선생님! 희주 넘어졌어요!"
"피나요, 피! 피!"
놀란 아이들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놀이터 나무 난간을 짚고 선 희주의 무릎에서는 빨간 피가 솟아나고 있었다.
이를 어째.
무릎까지 내려온 흰색 레깅스에도 피가 잔뜩 묻었다.
하필 희주가 넘어진 곳이 충격을 흡수해 주는 바닥재가 깔린 곳이 아니라 유치원 현관과 놀이터 사이를 오가는 빨간 벽돌길......
나는 울고 있는 희주와, 흥분한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상처를 지혈하고 약을 발라준 후 상황 설명을 위해 어머님께 전화를 드렸지만 어머님과는 통화가 되지 않았다.
희주 귀갓길에 희주를 돌보아주시는 할머님께 상황을 설명드렸고, 아이는 웃으면서 귀가했다.
......
그날 저녁 8시 무렵, 희주 부모님이 함께 유치원에 방문하셨다.
어머님은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원감선생님께 도대체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을 어떻게 보았으면 넘어졌느냐, 선생님은 그때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느냐, 여긴 CCTV가 왜 없냐, 누가 민 것은 아니냐, 어떻게 혼자서 넘어지냐...... 아이가 입은 흰 바지가 피에 젖어 너덜너덜해질 지경인데 연락도 없었냐, 등등. 생각하시는 모든 것들을 가감 없이 말로 쏟아냈다. 하지만 어머님보다도 소리 없이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계신 아버님의 눈빛이 너무나 무서웠다.
다시는 이런 일 없게 신경 써 달라는 얘기를 끝으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자 원감선생님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고, 나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울지 마, 뭐 이런 걸로 울어."
"죄송해요, 원감님."
"전화했는데 받지도 않으셨다면서. 선생님 잘못 아니야."
시실 희주는 평소에 자주 넘어지는 아이였다.
혹시나 신체조정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된 나는 희주의 어머님과 의논을 하고 싶었는데, 금융계 회사에 다니신다는 어머님과는 평소에도 연락이 너무나 어려웠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원감님도 잘 알고 계셨다.
"그래도. 죄송해요."
나는 원감님 댁에서 늦은 시간까지 엄마를 기다리고 있을 다섯 살짜리 꼬마 아이에게도 미안했다.
......
그 후로 두어 달 정도 지난 어느 날, 왼쪽 뺨부터 시작해서 팔꿈치, 허벅지와 종아리까지 쓸린 상처 사이로 피가 배어나는 채로 희주가 등원을 했다.
어머. 무슨 일이야? 등원길에 다친 건가?
원감선생님께 상처 처치를 부탁드리고 희주 어머님께 전화를 드렸다.
뚜루루루루룩...... 뚝
뚜루루루루룩....... 뚝
뚜루루루....... "여보세요."
세 번째 시도한 끝에 드디어 희주 어머님이 유치원에서 뵈었을 때와는 달리 굉장히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셨다.
"아...... 어머님, 죄송합니다."
아하. 아이가 혼자 넘어질 수도 있는 거군요?
그걸 아시는 분께서 지난번엔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바쁘셔서 아이를 위한 전화 통화도 어려우신 분이.
그날 이후로 나는 쏟아내고 싶은 많은 말들을 꿀꺽 삼키는 대신,
"죄송합니다"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