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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샬뮈 Oct 21. 2017

그 남자의 옷장

침대에 누워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옷장이 보인다. 옷장만큼 집에서 감흥이 없는 공간이 있을까 싶다. 머무르는 적거니와 노력을 거의 들이지도 않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날의 옷을 고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니까. 나의 옷장에는 심사숙고할 만큼 많은 옷들이 있지 않다. 지금까지 살아본 미국집에는 공통적으로 옷을 수납할 수 선반과 옷걸이가 설치되어 있었고, 나와 J 의 옷을 합쳐도 주어진 공간을 다 채울 수가 없었다. 침대와 가까운 방 옷방은 주로 입는 옷들과 계절에 상관없이 자주 입는 것들을 걸어두고, 서재로 쓰는 방에 위치한 옷장에는 잘 입지 않는 겨울 겉옷과 가방을 비롯한 잡동사니들을 둔다.


침대에서 세 걸음 정도 떨어진 옷장으로 들어가면 J의 옷이 맨 처음 보인다.  J의 옷은 눈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있다. 출근용 의복은 최소한으로 가지고 있는데, 일상에서 입는 옷은 그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많은 정도이다.

J가 옷을 사야겠다고 말하는 건 일 년에 두 번 정도인 데다가, 여기에서는 작은 체구인 그에게 맞는 옷을 찾기조차 어렵다. 미국 남자들이라고 딱히 키가 엄청 크거나 허리가 동양사람에 비해서 눈에 띄게 긴 편이지도 않은 것 같은데, 기본적으로 옷의 팔다리 길이와 허리길이가 길어서 가장 작은걸 산다 해도 옷값보다 수선비가 더 나온다. 아동복 16-18세를 도전했을 때는 그나마 성공한 경우가 있는데, 그런 옷은 재고가 없어서 구하기 힘들었다.


J와 산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그는 여름을 제외한 계절엔 꼭 라운드 넥 기본 흰 티셔츠를 내의처럼 입는다. 긴 티를 입어도 안에는 흰 티를 입는 습관이 이상하게 보여서 이유를 물었더니, 심리적인 안정감 때문이라고 했다. 심리적인 안정감을 얻는 방식은 다 다르니까 뭐, 그럴 수도 있지. 아무튼 매주 월요일은 흰 옷 빨래를 돌리는 날이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빨래를 하고 다음날 마른 옷들을 개고 있던 중이었다. 라운드 넥 흰 셔츠를 개려고 목 부분을 잡았는데, 가위로 자른 것처럼 둥근 목 부분이 툭 하고 떨어져 나왔다. 6년을 매주 두 번 이상 입었으니 면은 이미 헤질 데로 헤졌던 옷이긴 했지만, 목 부분이 그렇게 떨어져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J와 나는 이날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두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하고 있다.


안 그래도 빈한한 J 의 옷장은 최근엔 더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다. 2년 전만 해도 그는 나의 몸무게는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앙상한 몸이었다. 나만 너무 편하게 살고 있는 건가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J는 편하지 않은 생활을 하는 듯 보였다. 회사의 문제도 그랬고, 나와의 관계에서도 잦은 다툼이 있던 때였다. 이사를 하고 나서 얼마 후  J는  내게 더 이상 회사일에 아등바등하지 않기로 했다는 결심을 전했다. 사람이 너무 힘들면 어느 지점에서 놓아버리게 되는데, 아마도 그 시점이 작년 가을이었던 듯하다. 그 이후로 그는 무한도전 레전드 편을 깔깔거리며 더욱 성실히 보고, 술을 더욱 즐겨마시고, 기름진 것을 먹었다. 그리고 운동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6개월 뒤  J의 몸무게는 나를 훨씬 앞질렀다. J 의 몸은 밑 배 부분에만 두툼하게 살이 쪄서, 원래 맞았던 티셔츠는 밑 배만 둥그렇게 튀어나와서 옷태가 나지 않고, 바지는 허리 부분이 맞지 않아서 입을 수가 없게 되었다. 살을 빼게 해서 옷을 입힐 것 인가 아니면 지금 몸에 얼추 맞는 옷과 함께 재봉틀을 살 것인가? 몇 달째 결정을 미루고 있다. 이번 주 주말도 J는 군말 없이 있는 옷에 투정을 부리지 않고, 외출을 준비할 거다.  


J 의 옷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우리가 처음 만나게 된 4년 전 여름이 떠오른다. 지금이나 그때나 J는 옷차림에 대해서라면 0으로 수렴하는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주말에 데이트를 할 때 흠칫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싫어했던 것은 크로스 백이었다. 정형돈이 은갈치 양복과 함께 들고 나왔던 발리 삼색 크로스백의 짝퉁이었는데, 분홍색 폴로티와 유행 지난 청바지를 입고 그 가방을 옆으로 메고 나오곤 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던 때라, 옷에 대해 가타부타할 수 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것보다 특히 가방은  다시 찾아올 수 없는 곳에 내던지고 싶은 욕구를 매번 강렬하게 느껴야만 했다. 같이 살고 나서 얼마 뒤에 바로 가방을 버렸는데, 지금 생각하니 추억으로 남겨두는 것도 괜찮지 않았나 하는 평온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이것은 배부른 자의 여담일 뿐. 그 가방을 멘 J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2017/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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