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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샬뮈 Oct 21. 2017

어른들의 요람

침대에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이전에 살던 집 8415호에서는 언제고 지붕이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모든 게 불안정했고, 그 불안정이 당시에는 엄청난 압박으로 다가왔다. 새로운 사람을 내 인생으로 깊숙하게 들이는 일과, 생활공간의 기본값을 처음부터 재설정해야 하는 일이 쉽지 않았던 터라 마치 안전불감증 환자처럼 침대 위에서 바라본 천장이 위태로웠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를 떠올리며, 현재 232호의 천장이 더 이상 위태롭게 느껴지지 않는 지금이 낯설고도 반갑다. 나름 괜찮은 시작이다.    


침대는 우리 집에서 가장 비싼 가구이다. 잠만은 편하게 자야 한다며, 흔한 가격비교도 안 해보고 매장에 가서 누워보자마자 골라버렸다. 손가락 품만 팔아도 될 가격비교 조차 하지 않고 그렇게 질러버린 것이다. 눕자마자 몸이 매트리스 안에 폭 안겨버리는 촉감이 좋았고, 그렇게 잠을 자면 가장 편한 잠을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3년이 넘은 지금도, 침대는 내 몸에 맞는 푹신함과 적당한 단단함으로 편한 잠을 이끌어준다. 몸이 한없이 무거운 날엔 늦은 오후까지도 잠을 잘 수 있다.


오늘도 그랬다. 아침밥을 먹고 오전에 잠깐 누워서 침대와 안방을 꼼꼼하게 생각해보자고 시작한 것이 푹신함에 습관처럼 잠이 들어 깨어보니 오후 3시를 훌쩍 넘겼다. 머리도 아프고, 꿈을 꾸긴 했는데 어떤 내용인지 산란하기만 하다. 지금 사는 집에는 햇볕이 거의 들지 않는다. 생물의 필수 활동으로 햇빛을 찾아서 쐬야 마땅하지만, 귀찮은 날은 그 햇빛 한 줌도 귀찮다. 가장 쓸데없고, 지독한 게으름이다. 결국 오늘도 밖에 나가지 않고 않기로 한다.


낮잠이 들기 전에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침대에는 기억되지 않는 무수히 평온했던 날들과, 잊고 싶어도 철저하게 기억으로 남아있는 아팠던 날들이 있다고. 아무 일 없었던 날들은 당연한 날들 중에 하나지만, 그러지 않은 날들 앞에서 당연한 날은 또다시 아주 감사하고 소중한 날이 된다. 그렇게 경계를 나눌 수 없이 이런저런 날들이 뒤섞인다. 지금껏 가장 아팠던 침대 위에서의 밤은 처음 임신된 아이가 심장이 멈춰, 수술 날짜를 잡고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그날 밤, 마음을 몸이 이기지 못한 건지, 자연유산의 과정이 시작되었다. 진통제를 먹고 침대에 누워있는 것조차 고통스러워 끊임없이 자세를 바꾸며 누웠었다. 2년이 지난 지금도 고통의 느낌이 남아서, 하염없이 괴롭고 슬프기도 하다. 나는 아직도 그 침대에서 잠이 들고 하루를 시작한다. 다행히도 아주 드물게, 심장이 뛰다 말았던 아이를 생각하며.


이 침대에서, 나는 두 번의 생명을 잉태했고 그 둘 모두를 잃었다. 힘든 일이었지만,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기도 했다. 원인과 결과를 물어봐도 소용없고, 미리 준비한다고 해서 비껴갈 수 도 없는 일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결혼 후에도 쭉 가난한 삶을 살았던 엄마는 내게 종종, 저 사람 좀 봐라 그래도 우리 사는 건 양반이지 않냐며 자식의 투정에 대한 답을 하곤 했다. 짐작해보건대, 엄마의 삶은 오랜 시간 동안 괴로웠을 거다. 타인의 불행이 내 삶이 그나마 괜찮다는 위로가 되면, 행운과 행복은 내 삶을 시궁창으로 빠트리는 것이 되어버리니까. 세상의 불행과 행복을 무게로 환산한다면,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 모두가 아는 이 명확한 셈 앞에서, 남의 불행과 행복을 더하고 빼면서 자신의 삶을 흔드는 일을 우리는 왜, 멈출 수 없는 것일까. 이런 이유로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면, 타고나기를 비극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을 거다. 깨달은 척하고 싶지만, 솔직히 그렇지 못하다. 부러운 것들이 많고, 말도 안 되게 우쭐하는 어리석음도 있다. 나는 꽤 오랫동안 세상에 모든 것이 다 싫고 미웠다. 지금은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런 못나고 멍청한 시간이 내 인생의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다.  


내게 처음으로 생긴 침대에서는 가장 은밀하고 사적인 언어들이 오고 가고 쌓여갔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육체적 합일은 어쩌면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쾌락이자 호사일 것이다. 쾌락이라고 말함은, 어떤 외부의 경험으로도 재현될 수 없는 몸과 마음의 황홀경이기 때문이다. 호사라고 함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임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욕구가 다 채워지고 난 후에야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충분히 먹고, 자고, 주변에 나를 해하는 것이 없다고 안심이 되는 순간 드러낼 수 있는 욕구.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그다지 친절하지 않아서 때로는 친절이라는 무색하게도 잔인해서, 둘만 할 수 있는 언어는 자주 실패하기도 한다. 실패한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온기 때문에 괜찮은 순간이 있다.  또 한 가지 내가 타인에게서 위로를 얻는 순간은 누구나 외롭다는 거다. 모순적이게도 모두가 외로움을 공통분모로 가지고 있어서 나의 외로움도 괜찮다고 여겨진다. 그렇게 여긴다고 나의 외로움이 분해되는 것도 아닌데. 소수처럼 다른 숫자의 조합으로 만들어지지 못하고 1과 자기 자신밖에 없는데도 옆에 있는 소수를 반가워한다. 어쩐지 이상하지만,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인 거보다는 조금 더 우아한 거 같다. 그리고 소수는 생각할수록 그냥 숫자가 아니라 사람을 닮아있는 것 같다.


한 때 만났던 남자가 어떤 영화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같이 보고 난 뒤, "견디는 삶은 구리지 않나요? "라고 내게 물었을 때 이 사람과 오래 만날 수 없음을 예감했다. 나는 너무도 구리게, 계속해서 견디는 삶을 살고 있었으므로. 그 구린 삶에 대해서 온갖 사족을 붙여 변명, 혹은 납득을 위한 이야기를 건넬 힘이 내게는 없었다. 한참이 지난 지금은 더욱 그렇다. 설명해줘야 아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이 알 수 없는 부분인 거라고.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것은 이미 비슷한 힘든 경험을 했지만, 사람의 그릇에 따라 얼마 큼을 담고 잊었는지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다 다르고, 알지 못한다. 심지어 나도 나 자신을 알지 못하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 가. 오로지 확실한 것은, 우리는 우리 자신도 타인도 알지 못한 채로 살다가 죽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로 공평하고 기울어지지 않은 삶에 대한 위로는, 우리는 다 어느 정도 무지하다는 사실뿐이다.


의식의 흐름을 바꿔 내 인생의 침대, 잠의 역사에 대해서 짧게 수다를 풀어보겠다. 내가 자라온 곳은 할아버지가 1950년대 직접 지으신 기와집이었다. 안방과 작은방 사이에 부뚜막이 있어서, 나무를 때 저녁상을 차리던 엄마의 뒷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난방도 땔감 나무로  때서 바닥을 지지는 방식이었는데,  아궁이에 가까운 아랫목에 동생 둘과 옹기종기 모여서 잠을 잤다. 장판이 아랫목 부분만 까맣게 익다 못해 타버렸고, 골고루 전달되지 않는 열 때문에 이불을 걷어차며 잠들었다가 감기에 자주 걸리기도 했다. (아파트가 주거지인 도시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생활의 양식이 1990년도에도 존재했다. 심지어 나의 본가에서는 2017년라는 숫자가 전혀 어울리지 않게,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한다.) 학교에 다니다 보면 친구들의 살림살이 수준이 천차만별이라 어쩌다 부유하다는 집 친구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 침대 있는 집이 질투 날 정도로 부러웠다. 점점 사춘기가 가까워져 오는데, 동생 둘과 매일 한 공간에서 잠을 자고 생활을 하는 일이 유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나의 꿈은 소박하게 방에 이 층 침대가 있고 , 위층이 내 잠자리가 되는 거였다. 그 꿈은 이십여 년이 지난 어느 겨울날, 뉴욕 맨해튼에서 반짝 이루어졌다. 게스트하우스에 1층 침대에는 동생이, 2층에는 내가 여행기간 동안에 묵었다.  매트리스가 너무 불편해서 잠을 제대로 자기가 쉽지가 않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다지 튼튼한 조립이 아니었는지, 아래쪽에서 동생이 움직이면 삐그덕거렸다. 그 와중에 가장 불편한 점은 화장실을 가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가는 일이, 하나도 즐겁지 않은 모험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는 거다.  이 층 침대에 대한 어린 날의 로망은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져 버렸다.   


2017/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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