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이 좋았던 4월의 어느 날, 갑자기 왼쪽 귀의 청력을 거의 잃었다가 여러 치료 끝에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약간의 청력을 되찾았다. 완전히 들을 수 없는 세상에 적응이 쉽지는 않지만, 오른쪽 귀가 다행히 정상청력이라 크게 어려움은 없다. 의사 말로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일을 해도 되고, 사람들을 만나도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도 사람이 많은 식당과 시끄러운 거리와 같이 여러사람의 말소리가 한꺼번에 들리는 일은 상당히 괴롭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원인을 찾으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가장 건조한 시점으로 본다면, 100명 중에 하나의 확률로 걸린 병이라고 말할 수 있고, 가장 자책하는 시점으로 보면 면역력이 안좋아질만큼 몸도, 마음도 스스로 보살피지 못한 탓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분명 행복한 순간들도 있었는데, 힘든 일들이 그 순간 만으로는 견뎌내지 못할만큼 무거웠던 걸까. 어디에 있어야 할 지, 무엇을 해야할 지 결단을 내릴 순간이 예기치 못한 순간에 불쑥 불쑥 다가온다.
그 와중에도 우습게도 로또 5등이 연속으로 세 번이나 당첨되었다. 꽝이면 그만 사려고 하는데, 자꾸 5등이라서 5천원씩 매주 복권을 샀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마음이 더 아프게도 마음을 주었던 강아지 두 마리가 파보바이러스에 걸려 죽었다. 동물병원도 데려가서 수액도 맞게하고, 약도 챙겨주었는데 결국 생을 다 하였다. 누렁이는 죽기전 날에도 내 옆에 가만히 앉아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다. 나는 누렁이의 등을 쓰다듬었고, 누렁이 먼 곳을 바라보면서. 엄청난 고통을 느끼고 있었을텐데, 옆에 앉아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문득 궁금해지고 가슴이 아린다. 흰둥이는 누렁이처럼 보내지 않으려고 일요일에 동물병원 원장님께 응급으로 전화를 드려 새벽에 시내에 나가 두번째 수액도 놔주고, 약도 먹였다. 그러고나서 3일 뒤에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 스스로 이겨낼 수 없는 병이었다는걸 아마도 알았을텐데, 얇은 끈이라도 놓지 않으려던 나의 욕심이 흰둥이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건 아닐까 후회가 컸다. 그렇게 어린 강아지들의 죽음 앞에서 펑펑 울었다. 시골 개 들의 삶이 안타까워서이기도 했고, 각자 다르게 타고난 삶의 시간은 아무리 애를 써도 어찌 할 수 없다는 체념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이 와중에도 다 큰 자식이 별안간 집에 와서 병원에 다니는데도, 하나도 귀찮지 않다고 말하는 엄마, 어미의 자식 사랑에 뭉클하기도 했다. 이렇게 다 컸는데도 아이 같아 보이는걸까.
주어진 시간의 병원 치료를 마치고, 다시 J의 곁으로 돌아왔다. J와 있는 공간이 정말 나의 집이 되어서인지, 비행기에서 내려 집에 온 그 날은 깊은 잠을 잤다. 어쩌면 J가 나의 집이 되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 또한 나이들어가는 과정일 지 모르지만, 그 자리에 있어보지 않은 이상 어떤 말도 쉽게 건넬 수 없는 것이 인생인 것 같다. 섣부른 판단과 얕은 위로가 되지 않게 조심할 것, 말은 점점 어려워지고, 무거워진다. 어쨌든 힘든 시간은 힘겹게 통과할 수 밖에 없다. 더 겸손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시한번 생각한다. 병이 주는 유일한 장점은, 주어진 생을 더 낮은 자리에서 대면하게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다.
사는동안 누구나 한번쯤은 집 밖으로, 문을 열고 나올 수 없는 일들이 생기곤 한다. 원해서 일어난 일이든, 원치않아서 일어난 일이든 힘든 무게가 덜어지지 않는 지독한 순간들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럴때 필요한 건 흐릿하게 지나온 시간 속에서 뚜렷한 점을 찾아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점으로 남은 그 순간의 사람을, 풍경을, 냄새를 불러오는 일이 필요해는 때가 온다.
얼마 전, 부모님이 계신 본가에 있는 묵혀둔 방을 정리했다. 버리고 또 버려도 버릴 물건이 계속해서 나오는 것도 신기했는데, 더 놀라운 건 아주 어렸을 때 썼던 이불과 가구를 비롯한 자잘한 물건들에게도 어떤 분위기가 있다는 것이었다. 사물에도 사람의 기억이 배어 있어 각기 다른 기운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사물이 매개가 되어 집 안이 새로운 공간이 될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는 마당이 될 수 도 있을 것이다.
2017/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