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작은 말과 행동이라도, 사람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유유상종, 근주자적 근묵자흑, 마중지봉 같은 말들은 시대가 지나도 바래지 않는 진리처럼 유효하다. 서서히 스미는 것에 대하여, 옷에 대한 나의 태도에서 가장 많이 느끼고 있다. J의 옷에 대한 무성의함 혹은 무관심은 같이 살고있는 나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더불어 서로를 굳이 의식하지 않고, 옷의 기능적인 면에 집중하는 미국인들의 기본적인 삶의 태도가 겹침으로써, 나의 옷장은 자라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J 에 비하면 몇 배의 옷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사람들이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끼는 이유 중에 하나는, 별다르게 새로운 경험을 하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뇌의 자극이 적어지는 만큼, 어제와 오늘의 그리고 작년과 올해의 구별이 쉽지 않아지는 것이다. 옷에 있어서는 더욱 뇌가 더 굳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익숙한 것들로 단단해진 나의 취향을 보게 된다. 침대에서 다섯 걸음 정도 안으로 들어간 나의 옷장에는, 체크무늬 셔츠와 줄무늬 상의 그리고 카키색 외투가 벌써 20개나 된다. 그리고 아무 데나 입기 편한 단색 티셔츠가 15벌 정도가 있다. 일주일에 하나씩 입는다고 해도 한 주를 무난히 보낼 수 있을 정도이다. 단출하지만 군더더기 없는 옷이다. 그다음에 가장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계절별로 다르게 입고 있는 잠옷들이다. 겨울을 대비한 수면바지부터 한 여름의 더위를 지내기 위한 얇은 재질의 짧은 바지들이 나눠져 정리되어 있다. 가끔 쇼핑을 하다 보면, 온 세상에 있는 종류의 잠옷들을 다 사고 싶을 때가 있다. 옷의 재질별로 피부에 닿는 느낌이 달라서, 잠옷은 특히 부드러운 느낌의 것들이 좋다. 굳이 선호하는 브랜드 없이, 있는 대로 1-2만 원대의 옷들을 사 오곤 한다. 이케아 다용도 바구니가 두 개가 오른쪽 상단 선반에 올려져 있는데, 그중 4분의 1은 잠옷이다. 스웨터와 카디건도 좋아한다. 색깔 별로 사고 싶은데 늘 입던 것만 입어서, 새로운 도전을 하지는 않는다. 상의에 비하면 하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데, 이상하게 하의는 사지않고 상의만 사온다. 바지를 수선하는 과정이 귀찮아서 생긴 습관 탓이다. 바지는 8벌이 있는데, 살이 쪄서 잘 입지 못하는 바지가 그중에서도 3벌이나 된다. (쓰고 나서 보니 일단 바지를 사러 가야겠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비싼 옷은 버버리 코트인데, 작년에 사고 딱 세 번 입었다. 결혼기념일 선물을 고민하다가, J가 연말 상여금도 있으니 좋은 것을 사라고 해서 골랐던 옷이다. 매장에 가서 입어보니 소매가 길어서 줄여야 했는데, 3주 정도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기다리는 시간은 정말 즐거웠다. 하지만 옷을 가지러 가는 길에 주차장 입구에서 운전미숙으로 차를 긁었고, 막상 옷이 생기 고나니 그렇게 큰돈을 주고 샀어야 했나 라는 후회가 생겼다. 호기롭게 지른 옷이 딱히 내 몸에 맞는 옷은 아니었던 것이다. 누군가 그 옷을 알아봐 주면 당장은 조금 우쭐할지 모르지만, 내게는 엄청 좋지도 않고 편하지도 않은 것이 하나가 더 늘은 셈이다. 그래도 산 옷이니, 몸에 길을 들이는 쪽이 더 현명할 테지. 자주 억지로라도 입어야 겠다. 어느 정도 소득 수준이 되면, 그것에 비례해서 명품을 살 수 있는데 내게는 아직도 그게 어렵다. 아직도 J가 벌어온 돈에 대한 거리감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조금씩 내가 번 돈으로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사는 일이 훨씬 더 좋다. 미국에서의 벌이는 웹진에 글을 투고하는 것뿐이었는데, 글 당 5만 원을 받았으니까 30만 원 남짓 되는 돈을 벌었다. 그 돈은 충동적으로 구입한 책 값으로 다 써버렸다.
내가 원래부터 단출한 옷만을 선호하고, 명품에 대한 욕구가 없던 것은 아니다. 돈 버는 일도 고되고, 취향이 높아져봤자 현실에서 이루기가 어려워서 포기한 까닭이 더 크다. 이십 대에는 특이한 옷들을 찾아서 벼룩시장을 자주 돌아다녔다. 싸고 특이한 옷들이 주는 기쁨이란! 남아있는 옷은 거의 없지만, 아직도 그 옷들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게 기억한다. '나잇값'의 기준이 가장 엄격하게 적용되는 것 또한 옷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이 때에 맞는 브랜드를 찾고, 디자인을 찾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족들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많은 질타를 받으니까. 옷에서만은 모든 사람이 나잇값 들지 않고 좋아하는 것을 거침없이 입었으면 좋겠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화려한 꽃무늬 드레스에 흰색 스니커즈를 신고 봄날을 보내고 싶고, 호랑이 자수가 놓인 잠바를 입고 가족모임에 당당하게 가고 싶다. 이제는 하고 싶은 걸 다 하기 위해서는, 욕먹을 준비 먼저 하게 된다. 몇 년 전만 해도 겁날 게 하나도 없었는데, 지금은 뭐가 두려워진 걸까? 혼자가 아니라서? 나이가 거르지도 않고 먹어가서? 진짜 나의 취향을 생각하니 문득 슬픔이 밀려온다. 좋아하는 것들을 왜 미뤄왔던걸까, 나를 위한 옷입기를 안한 지 오래라는 깨달음이 퍼뜩 들었다.
옷장의 품목들은 정말 다양하다. 계절별로, 상황별로 필요한 것이 너무나 많다. 역할이 늘어가면서 옷장은 커져만 간다. 8년 전에 선배 언니의 자살소식을 듣고, 황급히 찾아간 장례식장에 빨간 양말을 신고 있어 발을 꾸역꾸역 숨기려고 했던 날이 가끔 떠오른다. 이제는 뭘 몰라서 그랬겠지, 라는 쉽고 간단한 용서를 구하기가 어려울 거야. 그때보다는.
2017/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