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주는 J의 휴가였다. 미국에서의 마지막 여름휴가라, 아직 안 가본 서부와 캐나다 밴프 그리고 푼타카나 등의 후보지를 두고 고민을 했으나 왕복 8시간 애틀란타 나들이에도 오른쪽 귀 통증이 생겨서 포기하기로 했다. 할 수 없이 동네 주변과 집을 중심으로 온전한 휴가를 보내보기로 하고 나름의 계획을 짜고 움직였다. 놀랍게도 단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 매번 휴가 때마다 틀어질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럴만한 일이 거의 없었다. 아, 휴가 첫날이었던 월요일 저녁에 기분이 상한 일이 있기는 했다.
같이 텔레비전을 볼 때, J는 여성 출연자들을 보고 예쁘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여자 연예인 중에 이상형을 물으면 자기는 그런 이상형이 없다고 말했었다. 그러던 월요일 저녁에 우리는 프로듀스 101 시즌 1을 다시 보기 시작했는데, 청하를 보더니 감탄하며 청하는 진작에 완성형이었다며 다른 애들이랑 다르고 정말 예쁘다는 말을 (한 번도 아니고) 세 번 정도 반복해서 말했다.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다. 그렇지만 그 말을 J를 통해 듣는 것이 묘하게 좋지가 않았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다가 보니 갑자기 화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문득 생각해보니 J는 내게 예쁘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고, 그를 알게 된 후 처음 듣는 예쁘다는 말이 청하를 향해 있는 것이 화의 불씨를 댕겨버린 것이다. 도와줄 게 없냐고 주위를 서성거리던 J에게 나는 소파에 앉아서 예쁜 청하나 더 보라고 강짜를 부렸다. J는 어이가 없었는지 웃음이 터졌고, 청하를 어이없게 질투하게 된 나도 기가 막혀서 결국 웃어버렸다. 뒷정리까지 마치고 '청하 사건'에 대해서 말해보자고 하고 소파에 양 끝 쪽에 앉았다.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얘기를 했더니, J의 대답이 2차 불씨를 키웠다. 자기는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라며, 나는 예쁜 거랑은 다른 장르의 사람이란다. 다른 장르가 뭐냐고 했더니 귀여운 거라고 대답했다. 나는 이 얼굴로 30년을 넘게 살아왔다. 다시 말하면 내 얼굴이 어떤 지, 주변에서 뭐라고 말하는지 가장 잘 알고 있다는 거다. 이례적으로 내가 미녀라고 추앙받았던 것은 10년 전 모로코 여행에서 현지인에게 들었던 극찬이었고, 이것은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일 확률이 매우 높다. 이렇게 주제 파악을 잘 하고 있는 나에게 법적 동거인이 할 수 있는 사탕발림이 예쁜 거랑 장르가 다른, 귀엽다 라는 표현뿐 이라니... 일리가 있는 대답에 어이가 없었다. 아름다움은 보는 이에 따라 다른 것임을, J는 지나가던 누구라도 악의가 없다면 대답할 수 있을 정도의 무난함과 적당한 객관적임으로 넘어가려 했던 것이다. 흥. 그러더니만 장난으로 '어이 거기 이쁜이'라고 선심 쓰듯이 영혼 없는 눈으로 말해서 더 화가 났다. 대형견으로 변신해서 J의 명치끝을 앞 발로 마구 처대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청하 사건' 이외에는 별 일 없이, 해결하지 못한 집안일을 처리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녔다. 미국에서 맛있는 거라고 하면, 피자나 햄버거 정도고 어느 동네에나 있는 태국이나 베트남 음식점을 찾아다니는 거지만. 밥을 먹고 졸리면 자고 일어나서 배고프면 또 먹고, 이런 게 휴가지 멀리 가서 색다르게 보내는 것만이 휴가는 아니니까. 고된 회사생활로 제대로 쉬지 못했던 J에게도, 매일 혼자 밥을 먹고 혼잣말이 늘어가던 나에게도 느긋하고 따듯한 시간이었다.
2017/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