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곡기를 끊는다는 말이 맨 처음으로 떠올랐다. 곡기를 끊는다는 말을 처음 들은 건 유치원에 다녔을 즈음이었다. 옆집 큰 할아버지는 병마로 오랜 시간 누워계셨는데, 곡기를 끊은걸 보니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어른들은 앞마당에서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엄마에게 곡기가 무슨 뜻인 지 물어보니까, 밥을 먹는 거라고 했다. 곡기는 한자대로 쓰면 穀氣. 곡식으로 만든 적은 분량의 음식이라는 뜻으로, 곡기를 끊는다는 말에는 생에 마지막을 선택하는 사람의 짙은 그림자가 누워있다. 반대로 부엌을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에게는 살아있어 든든하게 배를 채워야 하는 명랑함 같은 것이 흐른다.
밥을 누군가와 같이 먹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 지, 나는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알았다. 늘 사람들 틈에 있어서 밥을 같이 먹는 일이 너무도 당연했던 탓에, 밥을 혼자 먹는 시간이 쌓여가자 그동안의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듯 했다. J는 야근이 잦았고, 그나마 같이 밥을 먹는 주말에도 회사에 나가곤 했다. 혼자 밥 먹는 시간이 쌓이자, 삼시 세 끼를 챙겨 먹는 일이 버겁게 느껴질 날도 많아졌다. 그런 날은 마트나, 피트니스 클럽 혹은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소소한 이야기를 하는 게 작게나마 숨통을 터주었다. 다시 만날 사람도 아닌데, 자기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털어놓는 이곳 사람들이 아직도 낯설 때가 있다. 그래도 다정한 사람을 만나고 오면, 다정한 기운이 나름의 힘이 된다. (모두가 모두에게 친절하고 다정하면 세상은 훨씬 더 아름답고 살만해질 텐데!)
지금은 혼자 밥 먹는 일이 꽤 익숙해졌다. 익숙해졌다고 좋다는 것은 아니다. 아무런 느낌이 없어졌을 뿐. 혼자 식사를 준비하는 일은, 여러 사람의 끼니를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은 노력이 든다. 1인분을 하든 2-3인분을 하든, 재료를 다듬고 불을 쓰는 일은 똑같다. 그래서 혼자 먹는 일이 나태해지기 싫어서 나름의 법칙을 정했다. 한끼라도 제대로 먹고 예쁜 그릇을 쓰기로. 그릇에 욕심이 생기는 단점이 있지만, 아직은 집안 살림을 평균적으로 무리 없이 유지하는 중이다. 저번 주에는 꽃 접시를 두 개를 더 사 왔다. 자주 쓰던 꽃 접시가 설거지를 하고 건조기에 옮기는 과정에서 모서리에 부딪혀 금이 가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던 탓이다. 다행히 매장에 같은 것이 있어서 하나 더 얹어서 집으로 데려왔다.
나는 동물을 사랑하고, 자연을 정말 좋아한다. 지구환경을 지키는 일이 굉장히 시급한 인류의 숙제라고도 생각하고, 실천으로도 Animal Person 이 되려고 한다 (되고 싶다). 이런 얘기를 할 때마다 J는 코웃음을 치며 나의 설거지 습관부터 바꾸는 게 어떻겠냐고 말한다. 화가 나지만 수긍할 수밖에 없는 얘기다. 끝없이 통을 바꿔서 음식을 담는 나의 습관을 꼬집어 말하는 것이다. 상황은 이렇다. 음식을 용기에 담아 놓는다. 음식의 양이 서서히 줄어가면, 남은 음식에 딱 맞는 통을 찾아서 다시 옮긴다. 이렇게 하다 보면 하나의 음식이 많게는 5번 적게는 2번의 통을 거쳐간다. 오늘도 설거지할 통을 세 개를 만들었다. 내가 설거지하는데 왜 잔소리냐고 뭐라고 하고 싶은데, 설거지에 들어가는 물이며 기름때 벗긴다고 쓰는 세제며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낭비가 많다. 일회용도 덜 쓰고, 세제도 덜 쓰는 생활습관을 해야 할 텐데 쉽지가 않네. 가끔은 미국 사람들의 무지막지한 일회용 사용량을 보면 대한민국 같이 작은 나라에서 세세한 분리수거와 아껴 쓰는 일이 지구환경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일이 되는가 싶은 회의가 어쩔 수 없이 생기기도 한다.
플로리다를 휩쓸고 간 허리케인 Irma가 우리 동네까지 왔었다. 이틀 내리 비가 오고 추운 날이었다. 그렇게 많은 비와 바람을 쏟아붓고 왔는데도, 내쉬빌까지 으스스하게 만들다니.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은 언제나 초라하다. 초라한 마음일지라도 뱃 속은 언제나 명랑한 나는, 밥 한 끼를 챙겨 먹으려 냉장고 문을 열고 그릇을 주섬주섬 꺼낸다.
2017/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