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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샬뮈 Oct 21. 2017

있지만 없는 돈

열흘 하고도 하루를 내리 J와 같이 있다가 온전히 집에 혼자 있게 되니 쓸쓸하면서도 생기 있는 마음이 피어난다. 휴가의 마지막 날을 집안 청소로 같이 마무리해서, 월요일마다 혼자 해야 하는 대청소를 이번 주는 하지 않아도 된다. 나에게는 오늘이 정말 휴가일지도 모르겠다. 이곳은 닷새 후면 사월인 지금도 한낮 기온이 30도를 넘는다. Irma가 왔을 때 바짝 추워져서 꺼내놓은 겨울이불을 덮고 자면 등에 땀이 차서, 소파에서 추울 때 덮는 얇은 담요를 이불 삼아 잠을 잔다. 아파트 수영장에는 오늘도 햇볕이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광합성을 하려는 사람들이 구릿빛 피부를 뽐내며 누워있다.



아주 사소한 쓰임의 차이로, 필요한 물건들이 끝없이 생긴다.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면 그냥 써도 되는 것에 용도에 맞는 물건들을 찾아내고 있다. 집에 국자가 세 개가 있었다. 면이나 건더기를 뜰 수 있는 국자와, 움푹 파여서 그대로 떠내는 실리콘 국자와 스테인리스 국자 이렇게 세 가지 종류로. 간혹 작은 냄비에 라면을 끓이거나, 애매하게 남은 양의 국을 통에 옮겨 담다 보면 큰 국자로 담아내는 일이 빡빡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서 크기가 약간 더 작은 국자를 5달러에 사 왔다. 뜨거운 음식을 집거나 옮기는 집게도 작은 크기의 것이 필요해서 국자와 함께 사 오고, 또 오래 써서 칼집이 많이 생긴 도마를 새것으로 갈음한다고 28불을 더 썼다. 양념통을 걸쳐놓는 수납장과 오븐용 팬도 하나 더 사고 싶은 것을 참고 있다.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닌데도, 가끔은 쓸모를 가장해서 사치를 부리고 싶어 진다. 특히 부엌 물건에 대해서는 더욱 관대하게. 돈을 쓰고 싶은 것에는 표면적인 소비보다 더 복잡한 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 그 마음을 매번 헤아리면서 물건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집을 꾸미고, 유지하는 일에는 굳이 새로운 물건을 들이지 않아도 많은 부대비용이 발생한다. 물을 사 올 때 많은 양을 사 와서 옮길 때 필요한 플랫폼 트럭을 샀었는데, 쓰다 보니 바퀴와 본체를 잇는 부품이 많이 빠져서 헥스 볼트와 락 와셔를 사서 수리하는데 12불 정도가 들었다. 아마존에서 50불 정도에 샀었는데, 고치는 데 12불이면 적지 않은 금액이다. 차는 주기적으로 엔진오일을 갈아주고 상태를 체크해야 하고, 6개월에 한 번씩 보험료도 내야 한다. 매달 청구되는 전기, 인터넷, 물 값과 집 안에 필요한 물건들은 식료품 값을 빼더라도 큰 금액이다. 안전하고 편안한 집을 유지하는 비용은 생각보다 더 자잘하게 많이 들어간다. 해서 무엇을, 언제, 어디서 살 것인지 결정하는 일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철저하게 선택의 문제로 보이지만, 사실 소비의 뿌리 깊은 곳에는 가치의 문제, 즉 마음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다.


귀에 말썽이 생긴 후에, J의 회사 선배가 돈봉투를 준 일이 있었다. 병치례에, 한국행에 많은 돈을 썼을 테니 보태 쓰라며 쥐어준 돈이었다. J를 평소 좋아하고 아끼시던 분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돈을 받는 일은 여러모로 내키지가 않았다. 나는 못나게도 그분의 호의를 다른 꿍꿍이가 있지는 않나 의심도 했었고, 호의라 할지언정 절대 받을 수 없는 돈이라고 여겼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와 J와 선배를 식사자리에서 만나서 돈을 돌려드리려고 했는데, 얼굴을 보고 호의를 거절하는 일은 더욱 어려워 결국 돌려주지 못하고 받아오고야 말았다. 마음만 받겠다는 완곡한 거절에, 마음 말고 물질도 같이 받으라는 대답에 정중하게 되돌려 줄 말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돌려드릴 빚이다. 봉투에 가지런하게 들어가 있는 지폐를 보면서 나는 참 많은 생각을 했다.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 싶을 때, 호의로 받아들여질 금액과 부담이 될 금액의 차이에 대해서 그리고 돈이 사람에게 주는 삼라만상의 감정에 대해서.



 4개월 후에 한국에 들어가면, 집을 구하기 위해 빚을 져야만 한다. 다른 방법이 없다. 빚의 크기를 줄일 수는 있어도 빚 없이 집을 구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살았던 집들은  세탁기, 냉장고, 오븐, 식기세척기, 전자레인지까지 구비되어 있었던 터라, 혼수 장만하듯 하나부터 열까지 다 사야만 한다. 주재원의 삶으로 잠시 도피하고 있던 대한민국의 부동산 지옥과 돈에 대한 압박을 이제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 만원을 아낀다고 십 년 후에 내 집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한 푼이라도 아껴서 알뜰하게 살 지 혹은 오늘대로 즐기면서 살지는 개인의 선택의 문제다. 신기하게도 사람이란 돈 씀씀이에 있어서도 각기 다른 그릇을 타고 나는 지, 많이 쓰고 쓰는 만큼 또 벌면서 문제없이 사는 이도 있고 아껴 써서 악착같이 뭔가를 해내는 사람도 있다. 나는 돈에 있어서는 큰 그릇을 타고나지 못한 것 같다. 부모님과 사는 동안 내내 집을 가까스로 유지하는것만 봐와서 그런 지 큼직하게 돈을 쓰는 일에도 익숙하지 않고, 궁핍에 대한 공포가 여전히 있다. 돈이 없어서, 부모님의 노후가 걱정돼서 안전망이 없다는 불안감에 큰 도전을 해보지 못했고, 그럭저럭 빚을 지지 않고 사는 삶에 감사하면서 살기도 했다. J와의 삶이 안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가 묵묵하게 모으는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돈에 대한 태도에는, 한 사람이 평생을 거쳐온 흔적이 묻어 있는 것 같다. 정말 나중에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이 된다면, 안전망이 없어 낯선 세상으로 뛰어내리기를 주저하는 어린 친구들에게 물질적인 지원을 하고 싶다. 어렸을 적 은사님들이 내게 그랬듯, 주변에 좋은 어른들이 내게 베풀어주었던 것만큼. 지금 내고 있는 후원금을 끊지 않으면 다행인, 예비 빚쟁인데 꿈은 거창하다. 돈에 대한 고민을 이런 식으로 풀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나의 작은 사치에 대한 깊은 고찰 없이 얕게 흐르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사치에 심리적인 임계점, 왜 사고 싶어 지는 가 등등 이어질 이야기가 많을 텐데. 늦은 점심을 먼저 먹고 생각해 봐야겠다.



2017/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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