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날인만큼, 명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미국에서 산 후로는 명절 기분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번 주는 수영장 벤치에서 책이나 읽고, 낮잠이나 자면서 보내려는 목표를 세웠다.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요즘 날씨가 어찌나 다정한 지. 어제도 수영장에 나무 그늘 진 의자를 찾아서 단잠을 잤다.
본국이 아닌 타지에 나와있어 좋은 점 중에 하나는 명절에 대한 압박이 없다는 것이다. J와 살기 전에도 나는 명절이 정말 싫었다. 아빠가 장손이라 제사를 도맡아 하는 것은 엄마의 몫이었다. 추석과 설날을 제외하고도 세 번 이상의 조상들의 제사상을 차리는 엄마는 늘 날카로운 모습이었다. 여자들만 바삐 움직이고 가만히 앉아서 먹고, 상을 물리는 정도의 가벼운 일만 하면서 온갖 생색을 내는 남자 어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건 뭔가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남자 어른들보다 더 미운 게 엄마일 때도 있었다. 남동생을 설거지라고 시키려면 극구 말리며 부엌 밖으로 나가 있으라고 한다거나, 조상에게 잘해야 복을 받는다고 여자들이 원래 이런 일을 하는 거라고 말하는 것 또한 엄마였다. 화가 나서 아무 일도 안 하고 방에 들어와 있으면 분주하게 움직이는 엄마 때문에 편하게 쉬지도 못하고, 죄책감을 닮아있는 감정들이 생기기도 했다. 내게 가족모임은 늘 어딘가 계속 기울어져있고, 여자의 희생이 당연해야만 성사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 엄마가 가벼운 뇌진탕 증상으로 이상행동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집안 모임은 자연스럽게 없어졌다. 제사와 차례상을 채근하는 할머니와 친척들이 있지만, 엄마는 '제사' '시어머니'라는 단어만으로도 소리 내어 울거나 발을 동동 구르는 증상을 보여서 아무도 섣불리 추진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왜 누군가 직접 하지 않고, 엄마를 채근해야 하만 할까? 엄마가 아니면 이 집안의 조상 모시기는 할 수 없는 일일까? 며느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조상 모시기라는 게 수십 년간 지켜온 자손들의 예절인가? 엄마는 이제야 본인의 속마음을 말하고 남을 신경 쓰지 않는다. 며느리로서 산 지 딱 3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제사상 차리기가 정말 싫었노라고, 시어머니는 안 보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온몸으로 말한다.
나는 J와의 삶을 선택한 거지, J의 집안에 역사적인 사명과 의무가 있어서 같이 살기로 한 게 아니다.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라고 뒤늦은 후회를 하는 큼직한 사건은 명절 즈음에 생겼다.
J가 먼저 미국으로 나가 있고, 결혼 한 첫해에 혼자서 설날을 치르러 시가에 내려갔었다. 내게 먼저 말을 걸어주는 사람들도 거의 없고, 모두들 J가 얼마나 잘나고 기특한 사람인가에 대해서 혹은 그동안 가족들이 쌓아온 이야기를 하기에 바빴다. 일찍 자리를 비운 J의 어머니를 대신해 맏며느리 역할을 하는 작은어머니가 일을 지시하거나, 방법을 알려주는 것 외에는 어떤 말도 듣지 못했다. 그 날 저녁에 혼자 나와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서 폈다. 일하는 기계가 된 것 같은 느낌이랄까, 털어내기 힘든 불쾌한 감정이 구석구석 진득하게 붙어있었다. 만약 그 자리에 J 가 가만 앉아서 먹기만 하고, 가족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면 더 화가 났을게 분명하다.
그 다음 사건은 J의 아빠, 아버님의 생일날이었다. 생일을 챙겨드리러 혼자 시가에 내려가 저녁밥을 같이 먹고 하룻밤 자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시고모의 전화를 받았다. 올라가는 길이라 했더니, 며느리 생겨봤자 소용없다고 우리 오빠가 불쌍하다는 말을 다짜고짜 내게 하시며, 니 요리 좀 맛보려고 했는데 벌써 가니?라고 물으셨다. 기차를 타는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대거리를 하는 게 피차 좋을 일도 아니고 어이없게 힘을 빼는 일이라 하지 않았다. 이후 시고모는 유산 이후 한국에 난임검사를 하러 온 내게, 몸이 차서 애가 잘 안 들어서는 거니까 찬물을 먹지 말라는 말도 했다. 그 이후로 나는 시고모들을 피한다. 그들도 그런 삶을 살아왔기에 내게 강요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지만, 나는 그들과 다른 삶을 살고 싶다. 여자라서 그렇게 견뎌야만 하는 삶은 없다.
J와 명절에 대해서 우리 사이에 조율이 필요할 것 같다는 말을 했다가 불편한 상황이 생겼다. 각자의 부모님과 명절을 보내는 게 최고로 좋고, 그게 아니면 노동을 최소로 해서 모두 편하게 지내는 방식을 고려해보자고 했는데, 자신과 아버지가 친척들한테 곤란할 상황이 될 것 같다고, 음식은 사면되고 명절은 어차피 며칠 안되는데 그냥 하면 안 되겠냐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듣고 나와 J 사이에 아득한 거리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나는 나대로 싸울 것이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면 결정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며칠 전에는 명절에 가족끼리 식사같이 소소하게 일상을 나눌 정도로만 했으면 좋겠다는 얘기에 그도 동의했다. 같이 겪어봐야 알 일이고, 싸울 일이 많이 남았다. 윗 세대의 당위를 바꿀 명분이 있다한들, 쉽게 타협이 될 지점이 아니니까. 나도 안다. J의 가족들이 악의가 있는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하지만 내가 행복해질 수 없는 관계라면 선을 긋는 수밖에 없다.
가족이어서 만나는 게 아니라, 만나면 좋은 사이어서 함께 하는 게 가족이면 좋겠다. 일상을 나누고, 서로에게 관심이 있고 보살피면서 위로를 해줄 수 있는 사이로. 기타노 다케시의 말처럼, 가족이란 누가 보지 않으면 내던지고 싶은 그런 짐이기도 하다. 그만큼 징그럽게 어려운 사이라는 뜻이겠지. 콩가루여도 좋으니, 그냥 각자가 자신대로 나름대로 사는 게 제일 낫지 않을까. 무소식이 희소식이거니 하면서. 하아, 어려운 일이다. 가족의 탄생이란.
2017/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