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겨울 사이의 계절 앞에서는, 한해의 어느 때보다 후회와 미련이 길게 드리운다. 동짓날의 긴 밤에 거리를 서성이고 있는 사람의 그림자와 그 뒤를 소리 없이 따르고 있는 고양이의 그림자, 또 그 뒤를 우연히 지나가는 어떤 생명의 그림자 길이만큼 한없이 꼬리를 무는 아쉬움이 배인다. 힘들었던 해는 지나가버리라는 미운 정이, 세어보니 좋았던 날들이 더 많았던 해는 붙잡고 싶은 미련이 남는다. 그래도 늘, 시간이 가는 일만큼 다행인 건 없다. 이 모든 게 지나가는 것 중에 하나일 뿐이고, 접힌 채로 있는 시간의 주름이 하나둘씩 펼쳐지는 일도 담담하게 된다. 어느 선가 들었거나 보았던 일들이 일어나고, 새롭고 놀라운 일들이 점점 낯설어지기도 한다.
하나의 사건의 의미를 완벽하게 파악하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단편적으로 사건을 투영한 혹은 있음 직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책도 이와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이 한 권의 책을 평생 매일 읽는다 해도 그것을 온전히 알 수는 없다. 언제, 어디서 읽었는지가 책에 대한 기억을 조작하기도 하고, 여러 번 읽을수록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은 복잡한 일이 되는 것이 다반사다. 수신과 발신의 영원한 엇나감에서 이해는 완성될 수 없다.
올해는 존 버거의 'G'와 게르트 브란트 베르그의 '이갈리아의 딸들'을 두 번째로 읽었다. 이해가 깊어졌다는 거짓말은 차마 할 수 없고, 다만 확실한 건 기억하고 싶은 구절이 첫 번째 독서 때와는 달라져있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새롭게 읽은 책 중에는 여러 번 읽고 싶은 책은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와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였다. 리디북스로 읽다가 좋은 책들은 오프라인에서 사서 소장하고 있다. 들고 다니기도 무겁고 이사 갈 때 가장 무겁고 짐스러운 책이지만, 보람 줄이 맨 마지막 페이지에 가 있을 때의 뿌듯함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인이 된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를 올해 안으로 다 끝내고 싶었는데, 요즘에서야 살아있는 날들 동안 천천히 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왜 작가의 삶이 무거울 수밖에 없는지, 가늠할 수 없는 무게를 희미하게 알 것도 같다. 시대를 관통하여 살고 있는 개인의 이야기는 다면적인 역사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고, 그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박경리 선생님은 말 이전에 마음으로 그 사람들을 품었기에 글을 끝까지 쓸 수 있으셨던 것 같다.
우리는 왜 글을 쓰는 걸까? 그 질문 이전에, 나는 왜 글을 쓰는 걸까? 조지 오웰이 말했던 네 가지 이유-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의 틀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 말했듯 정치적인 목적을 추구하며 글을 썼다. 이념의 혼란과 시대의 변화가 그를 작가로 만들었다. 1980년대와 2010년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글쓰기와 글 읽기의 목적은 어느 정도는 비슷하고, 세밀하게 보면 차이가 클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슷할 거고, 욕망을 실현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같다고 말할 수 없다. 굳이 조지 오웰의 네 가지 이유에서 가장 큰 동인을 뽑는다면 내겐 역사적 충동이 나머지 세 가지를 누를 만큼 강하다. 과학으로 임신을 비롯한 여러 질병의 문제를 완벽히 해결하지 못했고, 성평등의 과도기적 혼란이 사회적 갈등으로 분출되고 있고, 자본주의가 스스로 폭발하기 직전단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그런 시대를 나는 고스란히 경험한다. 그리고 이것이 나만의 경험이 아니라, 시대의 경험이기 때문에 나눌 수 있다는 믿음으로 쓴다. 누구와도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지 않는 이런 공간에서조차, 단어와 표현을 거르고 스스로 정한 높은 기준 앞에 좌절하기도 한다. 글을 쓸 때의 긴장이 사리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것에도 완전히 편해지지 않아야 흐트러지지 않는다. 글을 쓰는 일은 장애물 달리기처럼 생의 경험마다 뛰어넘어야 하는 어려움을 조금 수월하게 만든다. 긴장을 뛰어넘고 겪은 일을 말하는 것은, 뛰다가 자빠져도 운동복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다시 일어나게 한다.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글의 힘으로, 나는 시간과 시대와 시련을 견뎌내고 있다.
2017/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