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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샬뮈 Nov 04. 2017

조금 불행한 가족이야기

 오랜만에 엄마와 통화를 했다. 엄마의 마음은 챙겨주지도 못하고, 걱정되는 집안 사정에 대해 까칠하게 캐묻다 보니 어느새 또 아빠에 대한 짜증으로 이어졌다. 십여분을 내내 둥근 대답만 하던 엄마는  "너는 왜 이렇게 아빠를 미워하니, 엄마는 아빠가 좋은데"라고 질문인 지, 이제 좀 그만하라는 가벼운 짜증이 섞인 말인지 정확한 속내를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둘은 좋을지 몰라도, 자식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지 못할 부모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자식은, 어디서부터 무엇을 원망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채로 끝없이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동안 풍족하지 못했던 삶을 탓하지는 않는다. 물론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감사하는 마음이 더 컸다. 이제 아빠는 그동안 키운 게 있으니, 자식들에게 갚으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네 엄마는 자식에게 주는 걸 아까워하지 않는데, 그걸 보는 자기 마음은 다르다고 태연하게 말을 해서 감사한 마음마저 잊어버리게 하기도 한다. 말과 다른 마음이 있는데 못 알아보는 건 아닐까, 그래도 내가 모르는 아빠의 노력이 더 큰 게 아닐까, 다른 생각을 해보려 해도 아빠의 가시 같은 말들이 사라지지 않고 자꾸 미움과 분노를 키운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자식이라고, 부모가 보듬어주기를 바라서 그러는 기대가 아직 남아있어서일까. 아빠의 이기적임과 무책임한 태도보다 쉽게 던져진 말들이 더 아프다.  나 또한 조금이라도 아빠를 닮아있을까 봐, 자식을 낳기 두려운 마음이 있다. 혹여 내가 아빠에게 받았던 상처만큼 아픈 걸 대물림할까, 경제적인 것뿐 아니라 정서적인 면에서 좋은 부모로서 상호작용하는 일을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커진다. 살아온 날들만큼 엉켜버린 아빠와의 선을 어디서부터 잘라내고 마음을 다잡아야 할지 모르겠다. 오랜 고민이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자꾸 나를 갉아먹는다. 내겐 오래전부터 아빠가 없다. 없는 아빠를 살아있게 하기 위한 마음의 조각을 가까스로 붙잡는다. 이제는 왜 꼭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엄마처럼, 아빠에게 그저 살아줘서 고맙다고 말할 수 없다. 세상에 낳아준 것만으로 모든 부모가 자식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마음을 쓰지 않으면 부모-자식도 멀어진다. 엄마도 아빠도 노력해야 비로소 될 수 있는 이름이고 자식은 알아서 크지 않는다. 제발 아무나 쉽게 부모가 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아이는 부모의 세상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는가! 그리하여 이 괴로운 굴레를 굳이 세상에 더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톨스토이가 말했듯, 모든 행복한 가족들은 닮은 데가 있다. 그러나 불행한 가족은 그 자신의 독특한 방법으로 불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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