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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샬뮈 Nov 30. 2019

남겨둔 문장




박민규,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큰일이었다. 세상은 이미 프로였고, 프로의 꼴찌는 확실히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프로야구 원년의 종합팀 순위로 그것을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6위 삼미 슈퍼스타즈: 평범한 삶

5위 롯데 자이언츠: 꽤 노력한 삶

4위 해태 타이거즈: 무진장 노력한 삶

3위 MBC 청룡: 눈코 뜰새없이 노력한 삶

2위 삼성 라이온즈: 지랄에 가까울 정도로 노력한 삶

1위 OB 베어스: 결국 허리가 부러져 못 일어날만큼 노력한 삶


아마, 실로 무서운 프로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고 16살의 나는 생각했다. 그럼 평범한 삶보다 조금 못하거나 더 떨어지는 삶은 몇위를 기록할까? 몇위라니? 그것은 야구로 치자면 방출이고 삶으로 치자면 철거나 죽음이다

...

찬찬히, 나는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위의 순위는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일종의 최면처럼 거대한 오해와 착시를 유발한다. 위의 순위를 다시 성적순으로 나열해보자면



1위 OB 베어스

2위 삼성 라이온즈

3위 MBC 청룡

4위 해태 타이거즈

5위 롯데 자이언츠

6위 삼미 슈퍼스타즈



아무리봐도 3위나 4위가 그럭저럭 평범한 삶처럼 보이고 6위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최하위의 삶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프로의 세계다. 평범하게 살면 치욕을 겪고, 꽤 노력을 해도 부끄럽긴 마찬가지고 무진장 눈코 뜰새없이 노력해봐야 할만큼 한거고, 지랄에 가까운 노력을 해야 '좀 하는데' 하는 소리를 듣고. 결국 허리가 부러져 못 일어날만큼의 노력을 해야 '잘하는데' 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꽤 이상한 일이긴해도 원래 프로의 세계는 이런것이라고 하니까.


#박민규 #삼미슈퍼스타즈의마지막팬클럽






에단호크 장편소설, 이토록 뜨거운 순간 


`이를테면 이런 거지` 데커가 말했다.


오밤중에 깼는데, 우유가 마시고 싶어 죽겠는 거야. 그래서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 내려와 캄캄한 어둠 속에 발가락을 내딛고는 고통 때문에 비명을 지른 다음 절뚝거리며 냉장고로 갔단 말이지. 냉장고 문을 열었더니 불빛이 너무 휘황찬란 한거야. `이제 살았다!` 라고 한마디 하고 우유가 담긴 종이팩을 열고 숨을 가다듬은 다음 입술을 들이댄다 이 말씀이야. 근데, 우웩, 썩은 우유였어. 물론, 벙찌는거지. 하지만 낡고 외로운 침대로 돌아갈 때 이렇게 혼잣말을 하는거야. 잠깐, 어쩌면 그 우유는 그렇게 심하게 상한 건 아닐지도 몰라. 난 아직도 목이 타는 걸? 그래서 다시 냉장고로 돌아가. 냉장고 불빛이 다시 맘을 설레게 하지. 다시 조심스레 쩝쩝 맛을 보지만 역시 상한 맛 인거야. 적어도 내가 겪었던 거의 모든 남녀관계에 들어맞는 은유라고 봐."


데커가 상자에 걸터앉아 짐을 꾸리는 내 귀에 대고 끝도 없는 잡소리를 지껄여댔다.



 #이토록뜨거운순간 #에단호크




심보선, 어찌할 수 없는 소문


나는 나에 대한 소문이다 

죽음이 삶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불길한 낱말마다 나는 전전긍긍 살아간다 나의 태도는 칠흑같이 어둡다  


오지 않을 것 같은데 매번 오고야 마는 것이 미래다 미래는 원숭이처럼 아무 데서나 불쑥 나타나 악수를 권한다 불쾌하기 그지없다 다만 피하고 싶다


오래전 나의 마음을 비켜간 것들 어디 한데 모여 동그랗고 환한 국가를 이루었을 것만 같다 거기서는 산책과 햇볕과 노래와 달빛이 좋은 금실로 맺어져 있을 것이다 모두들 기린에게서 선사받은 우아한 그림자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쉽고 투명한 말로만 대화할 것이다 엄살이 유일한 비극적 상황일 것이다


살짝만 눌러도 뻥튀기처럼 파삭 부서질 생의 연약한 하늘 아래 내가 낳아 먹여주고 키워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 이 불쌍한 사물들은 어찌하다 이름을 얻게 됐는가


그렇다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이 살아 있음을, 내 귀 언저리를 맴돌며, 웅웅거리며, 끊이지 않는 이 소문을, 도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심보선 #어찌할수없는소문





가스통 바슐라르, 불과 시학의 단편들


우리는 과거를 수정하지 않고는 사고를 창안하지 못한다. 수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진정한 사고를 끌어낼거라 기대해 볼 수 있다.  원초적인 진리란 없고, 단지 원초적인 오류들만 있을 뿐이다.  p.47


 #가스통바슐라르





정유정, 내 심장을 쏴라


비행에 대한 갈급증, 조만간 닥쳐올 실명에 대한 두려움....되풀이된 탈출시도, 생각들이 한길로 줄달음쳤다.최기훈이 서있던 자리를 떠났다. 함께 있던 사람들도 떠났다.승민은 철망에 이마를 대며 물었다. 


"넌 누구냐?"


당황스러웠다.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가끔 궁금했어. 진짜 네가 누군지, 숨는 놈 말고, 견디는 놈 말고,


네 인생을 상대하는 놈, 있기는 하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화가 났다. 잘 놀고있다가 별안간 따귀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돌아서서 문짝에 등을 기댔다. 내가 제대로 들었다면, '존재의 증표'에 대해 물은거라면, 내놓을 것이 없었다. 내 인생에서 나는 유령이었다. P.239-240 


#정유정 #내심장을쏴라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용기를 내라, 그게 어쨌단 말인가! 얼마나 많은 일이 아직도 가능한가!......그대들이 실패했고 반밖에 성공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무엇이 이상한가!      


#니체 #차라투스투라는이렇게말했다





기형도, 비가2-붉은달


세상은 온통 크레졸 냄새로 자리잡는다.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있으라.

턱턱, 짧은 숨 쉬며 내부의 아득한 시간의 숨 신뢰하면서

천국을 믿으면서 혹은 의심하면서 도시, 그 변증의 여름을 벗어나면서.    


#기형도 




브뤼트 21호 201102/ 정여울 문학평론가


남녀 사이에 '에로틱한 우정' 은 가능할까. 사랑만으로도 벅차고 우정만으로도 소중한데 사랑과 우정의 장점 모두를 한입에 털어 넣으려 하다니. 사랑하면서도 구속하지 않는, 죽마고우처럼 신의를 지키는 에로틱한 우정. 그것은 어쩌면 아무런 수식어가 필요없는 '사랑'에 순수하게 '올인' 할 수 없는 현대인들이 상상해낸 '편리하고 효율적인 사랑'의 판타지인지도 모른다. 에로틱한 우정을 빙자해 카사노바도 울고 갈 엄청난 바람기를 정당화하는 대표적인 캐릭터, 그가 바로 토마스다. 에로틱한 우정은, 결혼하고도 버젓이 연애하고 싶은 남자들의 앙큼한 상상력을 응축한 지극히 이기적인 발명품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것은 밀란쿤데라의 명작에서 중요한 키워드가 되는, 매우 철학적인 화두이기도 하다.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 한쪽을 선택하지 못하고 그 무거움과 가벼움의 장점 모두를 향유하고픈 인간의 근원적인 화두, 그것이 바로'에로틱한 우정' 인 셈이다. (....) 테레사가 내 마음속에 가장 오랫동안 남았던 이유는 그녀의 '나약함' 자체가 그 자신의 가장 위협적인 무기였기 때문인 것 같다. 그녀는 너무 나약해서 토마스의 연민을 자극했으며 너무 나약해서 토마스의 사랑밖에는 기댈 수가 없었다. 그 나약함은 역설적으로 너무나 '강력'해서 토마스의 평생의 신념마저 허물어버린다. 토마스는 그녀로 인해 그동안의 수많은 여성편력을 정리하고'Einmal ist keinmal 한 번 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의 세계에서 'Es muss sein 그래야만 한다'의 무거운 세계로 귀환한 것이다. 이 소설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나약성'에 대한 우화이기도 하다. 저마다의 나약함이 토마스에게는 '연민'으로, 사비나에게는 '도피'로, 프란츠에게는 '선의'로, 테라사에게는 '질투'로 나타난다. (...) 에로틱한 우정은 분명 이기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에로틱한 우정에 방점을 찍는다면,'에로틱' 이라는 말에 지나친 과민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남녀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긴장감이 바로 에로틱한 우정이 아닐까. 누군가를 '에로틱하다'고 느끼는 것은 타인의 매력을 전폭적으로 인정하는 태도에서 우러나오기에 서로를 우울증에서 해방시켜줄 것이고, 에로틱함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일상을 구속하지 않는 담담한 '우정' 이기에 서로의 존재를 '무거움'의 쇠사슬로 결박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정여울 #에로틱한우정 #브뤼트 #참을수없는존재의가벼움 #밀란쿤데라






고미타로, 어른들(은,이, 의) 문제야


개인적으로 마음 心 이라는 글자를 좋아하는데, 특히 그 글자의 생긴 모양이 시선을 모읍니다. 權 이나 軍 같은 글자는 획들이 모두 확실하게 붙어있지만 心은 각각 떨어져있습니다. 즉 처음부터 산만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산란하게 하지 말라는 것은 마음을 갖지 말라는 뜻이며, 깜짝 놀라고, 두근거리고, 용기 없이 우물쭈물하는 등의 인간적인 감정을 갖지 말라는 뜻입니다.


 #고미타로 





노희경 에세이, 지금 사랑하지 않는자, 모두 유죄


말, 어려서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친구는 소중한 것이고, 나보다 먼저 친구를 챙겨야하며,

친구와의 의리를 지키는 것은 목숨만큼 중요하며,

나는 늘 친구의 편에 서야 하며, 주고도 바라지 않는 게 친구관계여야 하며,

친구가 외롭고 괴로울 땐 항상 옆에 있어야 하며....

그러나, 철이 들며 알아가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그 누구도, 친구 아니라 부모와 형제도 나 자신만큼 소중할 순 없고,

목숨을 담보로, 재산을 담보로, 그 어떤것을 담보로 의리를 요구하는 친구는 친구가 아니다.

늘 친구의 편에 선다는 것이 반드시 옳진 않다. 주고도 바라지 않기란 참으로 힘이 들다.

살다보면 친구를 외롭고 괴롭게 버려둘 때가 허다하게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되는것이 친구다. 친구가 꼭 필요하냐는 질문에도 전과는 생각이 다릅니다. 

전엔 반드시 친구는 필요하다 느꼈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갈 수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니까요. 

친구하자, 친구하자 하며 허덕이며 세상을 헤매느니, 없으면 없는 대로 혼자 놀 방법을 준비해야 한다 말하고 싶어집니다.


#노희경에세이 #지금사랑하지않는자모두유죄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젋음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가슴 속에 풀리지 않는 채로 있는 것에 대해 인내심을 가지라. 

그 질문을 잠긴 방이나 외국어로 쓰인 책처럼 여기고 그 자체로 사랑하려고 애쓰라.

답을 찾으려고 애쓰지 말라. 

그 답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지금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을 경험하는 게 관건이다. 

지금은 그 질문을 살아야 한다. 

그러다보면 어느 먼 날에 점차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답을 경험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라이너마리아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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