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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자화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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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포 Jul 22. 2023

죽음

문득. 아주 갑자기.

‘죽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홀로 운전 중이었으며,

엑셀레이터를 꾸욱 밟으며

앞으로 빠르게 내달리고 있었다.


내 마음에 순간적으로 찾아온 생각

‘죽고 싶다’

이런 생각이 엄습한 건 아주 오랜만.


’죽고 싶다‘는 실현되지는 않을 정도의

작은 충동을 느끼며,

나의 생각을 분석하였다.

이 생각이 어디서 왔을까?


어제 장례식장에 문상을 다녀온 영향일까?

며칠 째 주륵주륵 비가 내려서 우울해진걸까?


1.

‘죽고 싶다’라는 생각은 대개

‘현재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으로부터 이어지며,

이는 현재의 어려움들을 견딜 수 없어서 일 것이다.


마치 여행지에서, 불만족하여,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중간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려고 하듯이.

나는 현재에 불만족을 느끼고, 참을 수 없는 정도에

다다른 것일까?


죽을 때까지 안식은 없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며, 고통을 극복하고자,

견디고자 애쓰며, 무던히도 삶을 이어나간다.


만일 죽음 이후에 있는 저 세계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그리고 저 세계에서의 상태가 현재보다 낫다면,

그리고 자살로도 그러한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면,

많은 사람들은 현재의 여행을 중도에 포기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신은 저 세계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살로는 ‘천국’에 다다를 수 없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문득 ‘죽고 싶다’라는 충동을 느낀 것은

저 세계에 대한 불확실성을 무릅쓰더라도,

현재를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단 말인가?


물론 현재는 힘들다.

해야 하는 일에 대한 압박감,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사회생활의 시작으로부터 지속되고 있다.


다만, 이것만으로는 ‘죽고 싶다’라는 생각을

채울 만큼의 정도에는 다다르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해진 것일까?


2.

‘죽고 싶다’라는 생각을 떨쳐내려면,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답이 필요하다.


나의 삶은 나의 의지로 시작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의지로 나는 삶을 유지하고 있다.


‘나는 왜 사는가?’

그 답이 단순히 ‘죽지 못해서’라면,

죽을 수 있는 방법은 아주 많이 있으며, 생각보다 쉽다.


마침 나는 운전 중이었으며, 마음만 먹으면,

집보다 먼저 죽음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왜 사는가?’

끝없이 깊은 우물을 바라보는 듯한 철학적인 질문은,

우선, 의미론으로 연결되며, 또한 자아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진다.


3.

의미론


나의 십 대, 이십 대, 삼 심대의 삶은

스스로 가치 있다고 굳게 믿는 믿음이 있었으며,

그러한 가치를 굳게 지키고자 분투하는 삶이었다.


지극히 종교적이었고, 인류애적 열정을 가졌던 나는

내가 살아가는 존재의 이유,

소위 말하는 ‘소명’을 끝없이 찾아 헤매며,

종교적인 의미에서, 이타적인 의미에서

나의 삶을 해석하고, 써나가려고 했었다.


설령 그것이 맞지 않다고 하더라도,

‘확신에 찬 진리’를 마음속에 품고 사는 사람들은,

그러한 상태만으로도 만족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수많은 종교에, 그리고 이단이라 불리는 집단에

많은 사람들이 의탁하며, 열심을 내고 살아가는 것일 수 있다.


이정표를 가지고 방황하지 않고 나아가는 사람들.

물론 그들이 가진 이정표가 올바른 것이 아니라면,

그들이 도달할 길은 그들이 그리던 파라다이스가 아닐 것이며,

그들이 믿었던 것들이 가짜였음을 마침내 발견할 것이다.


다만, 결과론이 아닌, 과정을 이야기한다면,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 확고히 살아가는 삶도,

나름의 의미는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본다.


왜냐하면,

나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청춘이라는 터널을 통과하였는데,

청춘이라는 터널을 빠져나오고 나서,

목적지(혹은 목적)를 잃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운전은 하고 있지만, 목적지가 없는 것과 같다.

아주 빠른 속도로 도로를 달리고 있지만,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지금 나의 삶은 이와 같다. 나는 방황하는 운전자이다.

혹시 운이 좋다면, 목적지를 발견하게 될까?


파주 미메시스 아트뮤지엄에서 만난 작품, Red


3.

자아인식


만족은 내부에서 온다.


경치 좋은 곳에 가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음악을 듣거나, 좋은 공연을 본다면,

우리는 만족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만족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만족은 외부에서의 상태가 나에게 영향을 주어서,

내가 스스로 어떤 상태가 되는가에서 나온다.


따라서 같은 여행지, 같은 공간이라도  

사람마다 그 만족도가 다를 수 있다.


지구별 여행자로서 현재의 나는

나의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만족감을 잃었다.

이는 ‘왜 사는가?’에 대한 답을 잃었으며,

‘나의 삶이 가치 있는가?’라는 질문에도

만족할 만한 답을 할 수 없음에 기인한다.


스스로 가치 있게 여겼던 것들.

진리, 지혜, 열정, 헌신, 희생…

나의 삶을 빛내던 촛불들이 꺼져가며,

나는 빛깔을 잃어가고 있다.


의미와 만족을 잃어버린 삶은 권태롭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지듯이.

사계절이 지나며 한 해가 오고 가듯이.

자연스럽게. 그냥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3.

죽음에 대한 충동은 때론 짜릿하다.

묘한 감정으로, 거리를 두고 삶을 바라보게 해 주며,

현재라는 무거운 짊을 가볍게 해주는 효과도 있다.


오랜만에 느낀 죽음의 충동을 분석하며 이 글을 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은,

오늘 내가 느낀 죽음의 충동은,

죽음을 실행으로 옮길 정도에 비하면 매우 미미하다.


바닐라라떼와 소금초코칩쿠키만으로 만족을 느끼며,

짜릿했던 죽음의 충동이 사라져 가고 있다…

파주 북카페눈, 바닐라라떼와 소금초코칩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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