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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포 Jul 18. 2023

자화(自话)

자기와의 대화

이미 20년도 지난 2002년에, 나는 북경에서 중국어 어학연수를 하였는데, 처음 한 학기는 일본인 룸메이트와 기숙사에서 함게 생활하였으며, 다음 학기에는 혼자 원룸을 구하여 생활하였다. ‘자화’라는 것은 당시에 내가 다이어리에 쓴 글의 제목이며, 그때의 글을 다시 옮겨 적어본다. (2002.7.4 작성)




대화(对话)는 상대방과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글 제목에 적은 자화(自话)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라는 뜻으로 내가 만들어본 단어이다.


대화라는 것은 둘 이상의 사람이 만나서 자신의 생각/견해/사고를 주고 받는 쌍방향 의사소통이다. 하지만 나는 때론 나 혼자서 대화를 한다. 혼자서 하는 대화는 대화가 아니라 ‘생각’이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으며, 너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다 그렇게 한다고 반문할 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문제제기도 내가 스스로 대화 속에서 반문한 내용이다. “네가 반문한 이것 조차 이미 다른 사람들도 다 해본 것이야.”라고 내안의 A가 말한다. 그리고 “A가 말한 것까지도 누군가가 다 경험해 본 것이겠지.”하고 B가 또 말한다. 이런 식으로 연쇄적으로 대화를 이어 나갈 때도 있다.)


여하튼 이것은 ‘생각’과는 다르다. 어떻게 다른지를 분명히 풀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마치 내안에 두 사람 이상의 누군가가 서로 대화를 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내 안에 자아(自我)가 하나가 아니란 말인가? 마치 사람과 사람의 대화처럼, 내 안에서 A와 B가, 혹은 A, B, C… 이상의 자아들이 대화를 한다. (A, B, C…의 자아들 중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 수 없기에 화자가 둘인지, 아니면 무수히 많은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참, 지금 떠오른 ‘생각’인데, 지금 글을 쓰는 이 지적활동은 손으로 글을 쓰는 것 외에 분명히 ‘생각 또는 사고’라는 지적 활동이 수반된다. 이것은 분명히 ‘생각’ or ‘사고‘이다. 내 안에 둘 이상의 자아들 간의 대화가 아니라 하나의 자아가 생각을 펼쳐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표현하고 있는 ’자기와의 대화‘라는 것은 분명히 이것과는 다르다.


‘생각’과 ‘자화’의 차이는 주체가 하나인지, 아니면 둘 이상인지에 따라 구분이 된다. 나는 이 ‘자화’를 매일 한다. 그리고 나는 ‘자화’를 통해 다른 이들도 분명히 자화를 하고, 나에게 “너만 그런 것이 아니야“ 라고 말할 거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런데 또 A가 말하길,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다. 매일 같이, 순간순간 자화를 하고, 그 정도도 다른 사람들보다 지나치게 깊은 것 같다.“라고 한다. 또 B가 말하길, ”아니야, 다른 이들도 다 그렇게 생각해“라고 말하지만, 이 화제에 대해서는 A의 말의 영향력이 조금 더 큰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자화에서 무슨 말을 하는가? 솔직히 너무 광범위하다.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20여년간 순간 순간마다 자화를 하는데 그 주제가 어떠 어떠 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굳이 떠오르는 모종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그날 그날의 일들에 대해 말한다. 있었던 일, 또는 있을만한 일, 또 어떤 때는 오래전의 일, 또는 한참 후의 일에 대해 말하며, 또는 같은 주제를 놓고 많은 시간에 걸쳐 여러차례 자화를 하기도 한다. 요즘은 중국에 와서 중국어를 배우며, 조금씩 말이 트이기 시작함에 따라, 자화에서 ‘중국어’라는 언어매체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것은 참으로 좋은 학습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입으로 한번도 말해본 적이 없는 말들을 자연스럽게 말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자화에서 이미 말해봤기 때문일 것이다. (이 같은 경우는 다른 사람들도 경험해 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있어서 자화라는 것이 어떨 때는 너무 귀찮게 여겨질 때도 있다. 왜냐하면 쉬고 싶고, 잠을 자고 싶을 때에도 내 안에서 자아들이 끊임없이 대화를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까? 나는 유독 불면증이 있었고, 그 원인의 상당부분은 자화 때문이다. 지금 중국에 와서는 나의 자아들도 피곤한지 자화가 조금 줄어들어 불면증을 조금은 면하고 있다.(어젯밤은 예외다.)


하지만, 자화에서 말하길 자화는 내 인생에 있어서 가치있는 활동이라고 한다. 나는 자화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인생을 설계하고 계획할 때, 또 무슨 일인가를 새롭게 진행할 때, 난 우선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그 이후에 또 내안에 많은 자화들이 오가며 일을 진행한다. (오늘 점심을 혼자 먹으며 자화를 하면서는, 이것이 나와 내안에 계신 성령님의 대화가 아닐까 하는 말도 했었다. 이것은 불경죄 일까? 더 자화해 봐야겠다.)  


그리고 가끔씩 자화에서는 엄청난 발상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애석하게도 그 발상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자화에서 말하길, “자화 中 중요한 내용은 메모로 남겨야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렇게 글을 적고 있다. 사실 이것도 오래전부터 여러차례 자화에서 제시했던 것인데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 적는 것이다. 오늘 또 미루었다면, 다음번 자화에서 또 옥신각신 다투었을 것이다.


희망하기는 자화의 내용들이 조금 더 창의적이고, 진보된 사고들이였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이렇게 기록을 해야한다. 여태껐 기록을 미루어온 결과 이미 두 가지의 큰 손실을 봤는데, 하나는 위대한 발상 또는 사고를 허공에 날려버렸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같은 내용의 자화를 반복해서 하지만, 진보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자화, 소결론을 내리자면, 자화는 누구나 한다. (이것은 나의 직관에서 나오는 추측으로 검증이 필요하겠지만, 거의 확실하다고 본다.) 하지만 사람 간의 대화에도 질적인 차이가 있듯이, 자화에도 각 사람마다 질적인 그리고 양적인 차이가 있다. 그리고 반복되는 자화, 허공으로 날려버리는 무의미하고 불면증만 유발하는 자화를 탈피하고, 보다 창의적이고 진보적인 발상을 동반하는 자화를 하기 위해서 ‘자화의 기록’이라는 방법은 매우 효과적이라고 본다.


 - 내면의 사고방식 1. One way communication(생각), 2. Two or more personalities communication(자화) 지금까지 사람들은(그리고 나 역시도) 둘 간의 구분을 두지 않고 같은 것으로 보아 왔지만, 이 둘은 분명히 다른 면이 있다.   


앞의 글들을 쓰고 자화라는 것에 대해 고찰하고, 내안의 추상적인 것들을 조금 구체적으로 풀어 나가보려는 시도를 한 이후에 잠시 동안 내안의 자화가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자화의 주체들(자아들)이 숨어버렸다고 할까? 내 자아들도 나만큼 조금은 반향적인 것 같다. (어제밤에는 칭화대에서 트랙을 따라 달리기를 하였는데, 나 혼자서 반대 방향으로 돌았다. 달리기를 하며 왼손잡이에 대해서도 생각했고, 시계는 왜 한 방향으로만 돌아가야 하나 하는 생각도 해봤다. 고정관념이란, 별다른 이유없이 하나의 습관으로 굳어져서 그 관념 이외의 것들을 이유없이 배제하는 것이다.)


자화가 잠시 끊어진 후, 다시금 자화가 이어졌는데, 중요한 하나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것은 영적인 것에 관한 것인데, ‘집, 사람, 사람간의 대화’라는 가시적인 것에 대비되는 ‘영적인 집(장소), 영, 자화’라는 비가시적인 것에 관한 내용이다.


비가시적인 것에 관해 생각해 보건데, 가시적인 것들처럼 증명을 통해 밝힐 수는 없을 것이고, 또한 어떠한 것은 옳고 어떠한 것은 그르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알수 없다. 관념화의 과정을 통해 사람들의 이해를 평이하게 해줄 뿐이지, 정확하게 ‘옳다’ 혹은 ‘그르다’라고 판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관념화 이후, 그 결과물을 사용함으로써 비로소 그 관념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것이 분명한 것들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때로는,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가리운다. 그리고 때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는 것보다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무수한 비가시적인 관념들 中 가장 보편적인 것의 하나로 ‘사랑’이라는 것이 있으며, 이는 관념화의 과정을 거쳐서 태어났고, 그 이후로도 계속 사용함으로써 마치 처음부터 지금의 관념물처럼 존재했던 것인양 되어 버렸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랑’이라는 관념의 내용이 처음부터 없어다는 것이 아니다. 관념화를 통해서, 관념화의 최종 결과물인 ‘사랑’이라는 언어의 옷을 입음으로, 비가시적인 것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만약 ‘사랑’이라는 언어의 관념물이 없었다면, 추상적인 감정은 있지만, 사랑에 대해 지금처럼 자유롭게 다루지는 못했을 것이다.) 예를 조금 잘못 든 것 같다. ‘사랑’이라는 것은 모든 곳에서 거의 처음부터 본능적으로 생겨난 관념물인지라, 예가 다소 부적절한 것 같다. 오히려 근현대에 들어 탄생한 관념물 중 하나인 ‘자아’라는 개념을 예로 드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지금 위 단락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비가시적인 것에 관해서는 관념화를 통해 사람들의 이해를 돕게하며, 추상적이고 모호한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관념물을 언어라는 옷을 입혀서 풀어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며, 그 이론 자체에 분명한 옳고 그름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미 관념물이 고착화 되어 방향성이 정해진 곳에서, 반대방향으로 사상을 전개해 가는 것은 고정관념에 의해 ‘그르다’라는 결론이 주어질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론이 이해를 돕지 못하여 모순점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틀린 이론’이라기 보다는 ‘좋지 않은 이론’이다.)


자, 이제 내 비유에 관해서 제기될 지도 모르는 논란에 대하여 미리 변명을 해 놓았으니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비유에 대해 말해 보겠다. ‘영(灵)’(지금은 우선 ‘영’이라 칭하기로 하고, 나중에 다른 관념화의 옷을 입히기로 하자)이라는 것은 자화의 주체 이다. ‘영주(灵住)’라는 것은 한 사람 안에 있는 있는 영의 집합 장소이다. ‘영주’안에서 영들이 모여서 자화를 하며, 인간의 내면의 사고 활동을 이룬다. ‘영주’는 닫힌 개념이 아니다. ‘영’들은 ‘영주’안에 들어 오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면서, 모여서 자화를 한다. 그렇다면 집에 주인이 있듯이 하나의 ‘영주’안에는 주인인 ‘영’이 존재할까? 일단은 존재한다고 가정하고(이것은 나의 직관적인 추측임), 주인인 영을 ‘주영(主灵)이라고 하자. ’주영‘은 태어날 때부터 존재한다.(생전과 생후에 대해서는 일단은 논외로 하자) 주영은 다른 영들의 출입을 조정하고, 자화 이외에도 내면의 사고활동인 ’생각‘이라는 것을 한다. 주영의 통제(허락) 아래서 다른 영들이 오고 가며, 어떨 때는 영주 안에 장기간 혹은 단기간 머물면서 자화를 한다.


’주영‘ 이외에 또 어떤 ’영‘이 있을까? 이것은 최대의 난제이다. 오늘은 자화의 주체인 ‘영’들이 자화가 이루어지는 장소인 ‘영주’에 모여서, ‘자화’를 한다는 것에서 그치도록 하자. 위에서 잠시 제기한 ‘주영’과 다른 ‘영’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직 뭐라고 말하기 어렵다.


여기까지가 2002.7.4일의 글이다.

 



이제 다시 21년이 지난 지금시점(2023.4.23)에서 그동안 생각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보완해 보도록 하겠다.

우선 먼저 밝힐 것은 지금 나는 20대의 그때 처럼 ‘자화’를 많이 하지는 않는다. 내 안에 다양한 목소리의 주체들을 잃어 버린 듯 하다.


자화의 주체로서 ’주영‘ 이외의 영들, 그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나의 그간의 자화 경험으로 보면, 우선은 가장 쉬운 ‘주영’ 이외의 ‘영’의 존재는, 내가 잘 알고 있는 주변사람들의 ‘영’이다. 부모님, 선생님, 친구들 등 내가 평소에 관계하고 만나는 이들, 그들의 Voice가 내 안에 있다. 여기서 Voice라고 하는 것은 목소리의 음색과 말투만이 아니다. 그 사람의 말하는 습관과 사고방식을 포함하여 copy된 voice이다. 자화 속에서 때로는 실제로 주변인들이 비슷한 상황에서 표현했던 문장들을 반복하면서 이야기가 이루어 진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실제 그 주변인들이 맞닿드려보지 않은 상황과 새로운 화제에서, 그들에게 들어보지 못했던 문장들을, 그들의 Voice를 통해서 듣게 되는 경우이다. 마치 꿈에서 친구가 나에게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하듯이… 자화 속에서 내가 알고 있는 타자의 ‘영’은 나의 ‘주영’과 대화를 한다. 나의 ‘영주’안에서 이야기 하는 타자의 ‘영’은, 나의 ‘영주’안에 존재하는 주변인을 Copy한 ‘영’이다.


어쩌면 실제로 내가 그 주변인을 만나서 같은 상황에서 이야기를 하면, 나의 자화 속에서와는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나의 ‘영주’에서 이야기 하는 그 주변인의 ‘영’의 의견은 내가 알고 있는 타인의 의견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자칫 잘못하면, 자화 속에서 타인을 오해하여 잘못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 타인의 의견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여, 내안에 존재하는 타인으로부터 Copy된 Voice가 잘못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영주’안에 나의 ‘주영’과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영(자아)가 존재하며 자화를 한다는 것이며, 그들 중 일부는 내가 실제로 대화를 해본 주변인들의 Voice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조금 더 확장해서 나가면, 만나보지 않은 인물들의 ‘영’들이 나에게 초대되기도 한다. 위인전기에서 읽은 인물들의 Voice를 내 안에 갖게 되는 경우, 혹은 우상과 같이 좋아하는 인물의 Voice를 내안에 갖게 되어서 대화하는 경우이다. 간혹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이 위기를 맞거나, 중대한 결단을 해야하는 순간에 ’선생님(혹은 존경하는 누군가) 이라면 어떻게 하였을까?’라고 생각하는 장면을 보는 것과 유사하다. 그럴 때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상상하는 장면을 통해 그들의 ‘모습’과 ‘음성’을 보여주곤 한다. 외부로 들리는 목소리의 볼륨은 없으나, 자화에서 그들의(혹은 그들과 닮은) 말투와 음색, 말하는 방식, 생각과 사고의 흐름을 가진 누군가와 대화를 하게 된다. 단순하게는 간단한 질의 응답이 될 수도 있고, 조금 더 들어가면 어떠한 화제에 대한 토론이 될 수도 있다.


조금더 확장해서 나가면,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자화’를 통해 ‘신’의 음성을 듣곤 하였다. 청년의 시절, 성경을 많이 읽던 그때에는 성경의 구절들이 나의 머리속에 있었으며, 어떠한 상황을 맞닿드리고 기도를 하면, 관련된 성경구절이 떠오르고는 하였다. 어쩌면 나의 이러한 표현이 불경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나의 ‘영주’에 ‘성령’이 있었으며, 나와 대화하였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쓰기로 한다. 다소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글들이다. 어쩌면 당시의 내가 정신분열증이 아니었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당시 꽤나 멀쩡하게 잘 살았었다.


참고로 이범선의 소설 <오발탄>에도  다양한 인격이 대화하는 장면은 표현되어 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는 개인 안에 있는 주요 감정들, ‘기쁨, 슬픔, 분노, 두려움‘이 화자가 되어서 서로 대화하면서, 상황에 따라서 주도권을 잡으면서 개인을 움직이는 장면을 담아낸다. 내가 쓰고 있는 ’자화‘의 방식은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각 감정들이 대화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그러나 다른 것은, 자화를 하는 주체들이 단순히 감정들의 특성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을 가진 주체라는 점이며, 고정된 인격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입출입(?)을 하면서 주체들이 변한다는 점이다.


‘자화’가 활발하던 2002년에 더 많은 글들을 적었다면 보다 많이 정리가 되었을 텐데, 지금 나의 내면은 다소 정적이 흐르고 있다. 지금 나의 ‘영주’는 조용하며, 외롭다. ‘생각’이라는 사고활동은 있으나, ‘자화’라는 사고활동은 많지 않다. 지금 나의 ‘영주’안에는 ‘주영’이 쓸쓸히 남아서 홀로 생각하는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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