矛盾
신은, 왜 optimize 하지 못하였는가?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셔서 함께한 여인이 주어서 선악과를 먹었습니다.'라고 본인의 잘못을 타인에게 전가하였다. 하와는 또 뱀에게 책임을 전가하였고. 그렇다면 뱀은?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하였을까? 성경에는 기록이 없으나, 임의로 추측해 보면 ‘신은, 왜 optimize 하지 못하였는가?’라고 신에게 책임을 전가하지는 않았을까?
신은, 왜 optimize 하지 못하였는가? 이 질문에 대해 나는 답을 모른다. 그리고 때론 ‘내가 답을 모른다’는 것이 ‘정답이 없다’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나는 알고 있다.
인생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인생의 모순은 음식과 대변, 물과 소변의 관계와도 같다. 마치 럭셔리한 사람들이 값비싼 음식을 우아하게 먹고서도 그 결과는 배설물을 배출하는 것으로 끝이 나듯이, 인생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인생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하늘이 있으면 땅이 있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이 있고,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다. 선과 악은 모순이며, 먹고 나서 눈이 밝아져서 선과 악을 분별하게 된 선악과는 결국 모순의 상자이며, 모순의 열매이다. 그리고 이 모순의 열매를 먹고 사망에 이르게 되었기에 사망의 열매이다. 성경에 에덴동산에는 사망의 열매(선악과) 외에도 생명나무 열매가 있었다고 하는데, 사망과 생명, 이 또한 모순이다.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사람도 누구나 허물이 있다. 그리고 때론 허물이 드러나게 되어 많은 사람들을 실족시킨다. 과거 민주화의 열사였던 존경받던 정치인들의, 우상과 같았던 연예인들의, 그리고 유명한 학자들과 목사들의, 음지에서의 모습이 노출되어 드러났을 때 우리는 충격에 빠진다. so what? 그래서 결론은? 인생은 모순이고,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 그냥 체념하고 되는대로 살자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는 out of my control, 나의 영역이 아니다. 중요한 건 내가 어떻게 사는가 이다.
문제는 나다. 인생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고, 나는 거대한 똥덩어리다. 그래도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는 모습만을 드러내 보이고자 노력하고 있다. 내가 똥덩어리라는 것을 의식할수록 그것을 감추고자 포장지에 더 집중하게 된다. 때론, 아니 대부분의 상황에서,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가리우고, 보이지 않는 그것이 본질일 경우가 많다. 그러나 보이지 않더라도 껍데기보다 본질이 중요하다. 우리는 콜라병을 보고는 콜라라고 부르지만, 실제로 중요한 것은 병 안에 담겨 있는 콜라이다. 콜라병 속의 콜라가 김이 다 빠져 맹숭맹숭한 상태가 되었다면, 여전히 콜라병이라는 외형으로 감추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콜라의 본질은 이미 변질된 것이다. 괜찮게 보이고자 노력하지만, 나의 내면은 똥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나는 거대한 똥덩어리이다.
타락천사(?) 물론, 나는 천사가 아니다. 다만 나는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고, 스스로에 대한 기준이 높은 사람이었으며, 약간의 강박관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마치 바닥에 유리천장이 있으며, 나는 그 위를 도도하게 걸어가면서, 유리천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쉽게 비판하고 손가락질하는 장면처럼, 나는 그렇게 살았었다. 유리천장 위를 거닐던 내가, 유리에 금이가고, 유리가 와르르 깨져서 천장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고, 스스로에 대해 실망하게 되었을 때, 나는 절망을 경험하였다. 내가 비판하던 사람, 내가 손가락질하던 사람이 바로 내가 되었을 때, 우선 나는 더 이상 아무도 비판할 수 없었다.
이문열 작가가 기독교를 비판할 때 접근하는 본질 개념은 ‘독선(独善)’이다. 혼자만 옳다고 하는 것, 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배타성에서 그는 기독교를 비판한다. 그렇지만 이문열 작가에게 반론하자면, 진리는 다수결이 아니다. 마치 수학문제에서 정답은 하나이고, 다수가 다수의 오답을 이야기한다고 하여서 복수의 답이 인정되는 것이 아니듯이, 진리는 다수결이 아니며,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독선이 아닌 종교는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 취미활동, 교양활동, 사교활동 일 뿐이다.
나는 독선과 아집, 그리고 자기 의(義)로 가득 찬 인생을 꽤 오랫동안 살아왔다. 그리고 스스로가 선(善) 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의 독선은 끝났다. 독선이 끝남으로써 얻은 유일한 교훈이 있다면, ‘비판은 쉽고 이해는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비판은 쉽고 이해는 어렵다. 이해는 그 상황에 처해 보지 않는다면, 쉽사리 할 수가 없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할 생각은 엄두도 못 내고, 손쉬운 비판으로 타인과 타인의 상태를 치부해 버린다. 예전의 나처럼.
가끔 이런 상상을 해본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내가 만나서 대화를 하는 상상.
-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그 시절의 나는 분명 손가락질하고, 비판하며 현재의 나를 무시하고 질책할 것이다. 그리도 따져 물을 것 같다.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은 매우 적을 것이고, 비판의 마음은 가득 차 있을 것이다.
-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현재의 나는 그 시절의 나에게 우선 실망시켜서 미안하다고 말할 것이다. ‘너가 아직 너무 순진하다고, 세상을 너무 모른다고, 사는 것이 그리고 인생이 그런 것이라고’ 꼰대처럼 말하고 싶은 약간의 마음을 가슴에 삼킨 채로, 과거의 내가 하는 비판과 질타를 그대로 듣고 있을 것 같다.
-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 현재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글쎄, 사실 이건 아직은 상상이 어렵다. 미래의 내가 어떤 경험과 사고가 누적되어 있고, 어떠한 상태에 처해 있는지에 따라 서로를 바라보는 감정과 대화의 내용이 다르겠지... 다만, 소망하기는 현재의 내가 미래의 나를 바라볼 때, 그 시선에서 실망만이 아닌 일말의 자부심을 가지고서 대화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으면 한다.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라는 간단한 관점으로 표현하였지만, 시간은 단절되어 있지 않고 흐르며, 그에 따라 나라는 존재는 시간을 타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흐른다.
물론 현재는 아직 결말이 아니며, 과정의 하나이다. 모순에 빠져 절망하였다고 해서 넘어져 있기에는 남은 인생이 아직 길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다시 일어서기에는 또다시 넘어질까 봐 미리 두려움과 체념을 하는 마음도 든다.
성경에서 예수는 '가롯유다가 자신을 배신할 미래의 상황과 그의 최후'를 아시는 상태에서, 현재(가롯유다가 자신의 발을 씻는 시점)라는 시간과 장소에서 유다와 대화하셨다. 예수는 또 '베드로가 머지않아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는 것, 그리고 더 먼 미래에 다시 뉘우치고 돌아와 자신을 위해 순교까지 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 아는 상태에서, 현재(베드로가 예수를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고 장담하는 상태)의 시간과 장소에서 베드로와 대화하셨다.
미래를 알면서 현재를 바꿀 수는 없었을지? 그리고 예수는 왜 베드로의 인생에만 개입(훗날 베드로가 숨어서 낚시를 할 때 그에게 나타남)하셨는지? 결국 모든 것은 신의 선택인 건지? 나는 의문이 많고, 모르는 것도 많다. 그리고 다시 반복하면, ‘내가 답을 모른다’는 것이 ‘정답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나의 모든 것을 아는 신은, 현재의 시점에서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여기서 ‘모든 것’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나의 행동과 생각뿐 아니라,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까운 미래에서 최후까지)도 포함한다. 비유하자면, ‘나‘라는 인생의 책이 한 권 있고, 그 이야기를 모두 다 읽은 독자가 책을 다시 읽으면서, 주인공인 ’나‘의 현재의 페이지를 보고 있는 시각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니다. 신은 독자가 아니라 이야기를 저술한 전지적 작가이겠다.
예수께서 현재의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가롯유다를 바라보던 시선일까? 아니면 베드로를 바라보던 시선일까? 물론 나는 현재 이후의 나의 미래를 모른다.
인생은 모순덩어리이고, 거대한 똥덩어리인 나는, 그럴듯하게 꾸미고, 앞날을 모른 채 모순으로 가득 찬 주어진 인생을 살아간다. 또 어떠한 모순들을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다. 과거의 나에게 현재의 나는 모순이다.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나와도 모순일 수 있다.
만일 모순덩어리인 인생이 끝나고, 심판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면, 나는 총체적인 관점에서 평가를 받을지, 아니면 최후의 시점의 나의 상태에 따라 평가를 받게 될지 알 수 없다. 만일 최후의 시점에서의 상태로 평가를 받게 된다면, 대충 살다가 마지막에 회개(?)하고 죽는다거나, 아니면 최고의 상태일 때 죽게 되기를 희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내가 앞선 글들에서 여러 번 다루었듯이 현재의 모습은 매일의 내가 모여 만들어진 ’누적평균‘이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이 언제 돌연간 들이 닥칠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인생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인생들은 죽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살고 있으나, 결국은 죽기 위해 사는 존재이며, 그러면서도 또 생명을 낳는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먼지하나 남지 않고 사라질 텐데도, 마치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처럼 죽음을 외면하며 일상을 살아간다. 이 또한 인생의 모순이다.
살면서 죽고 싶었던 적이 몇 번 있었는데, 두 가지 상태로 요약된다. 하나는 절망하여 죽고 싶었을 때이며, 하나는 완벽하여 죽고 싶었을 때이다. 나 자신에게 실망하여, 도저히 살고 싶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고 싶었다. 나 자신에게 만족하여, '더 이상 망가지지 않고 이 상태에서 죽는다면 천국에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태에서 나는 죽고 싶었다. 절망과 만족에서 죽음의 문턱을 느낀다. 이 또한 모순이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었고, ‘하나님께서 주셔서 함께한 여인이 주어서 먹었습니다.'라고 잘못을 타인에게 전가하였다. 반면에 선악과를 먹은 나는, 인생은 모순덩어리라고, 완벽한 사람은 없다고, 모두가 똑같다고 일반화의 논리로 변명하면서, 더 나아가 불경스럽게도 ‘그러면 신은, 왜 optimize 하지 못하였는가?’라고 신에게 책임을 전가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혹시 미래의 내가 구원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서 ‘혹시 선택되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선행을 쌓으려고 작은 노력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선행을 위한 큰 노력은 여전히 마음속에서만 간직한 채로.
이렇게 모순덩어리인 나는 모순덩어리인 세상 속에서 오늘 또 하루를 유유히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