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저널리즘은 라이프 스타일

기자를 관두고 진짜 기자가 되었다

by 미놀

오랜 시간동안 나는 기자로 살았다. IMF가 정리되고 한참 경제 붐이 일던 그시절부터 2022년까지 꼬박 20여년 동안 펜을 놓치 않았다. 중간에 외국에서 2년동안 지낼 때 조차도 통신원인 동시에 현지 언론사에서 프리랜서로 일하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묻는다. 해외에 공부하러 나가서도 왜 그 일을 계속 했냐고. 글쎄요, 다른 것은 못하니까요? 하면서 웃으며 얼버무린다. 여기에는 나만의 비밀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꿈이 '기자' '사장'이었다. 집으로 배달되는 '신문 냄새'를 너무나 사랑했다. 세로로 쓰여진 글자를 하나하나 짚으면서 읽고 나면 지성이 쌓이는 것 같았다. 지성이 먼지도 몰랐지만 하루 종일 신이 났다. 신문에 이런 일이 났는데 그 내막은 말이야 하면서 친구들에게 종알댔다.


당시 시, 산문, 일기 등 쓰기 대회에 나가서 곧잘 상도 받았다. 학교 선생님이 내가 쓴 글을 학우들 앞에서 읽어줄때면 어깨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졌다. 사람이 노력을 하면 정말 잘되는구나 하는 끝모를 자신감이 차올랐다.


"신문에 나는 사람 말고, 신문 만드는 사람! 신문 만드는 사람이 더 멋있어."


내가 대학을 가던 시절은 문과가 인기가 없었다. IMF가 덮쳐 먹물은 돈을 못번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신문방송학과나 국어국문학과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직장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에 덜컥 겁이나 아예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나마 가장 실용적인 곳이 경영회계쪽이었다. 두번째 꿈인 사장에도 다가 갈 수 있겠다는 짧은 생각에 그곳으로 향했던 것이다. 방황이 시작됐다. 수업 시간에 딴 짓을 하기 일쑤였고 동기, 선후배들과 어울려 노느라 공부다운 공부를 하지 못했다. 대학교 4학년, 취직 시즌이 다가오면서 나는 한 무역회사에 인턴으로 일하게 된다. 6개월 정도의 인턴 생활은 큰 울림을 주었다. 이 길이 나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속은 쓰렸지만 빨리 진로를 바꾸게 했던 단초를 제공해주었다.


그렇게 언론고시를 공부했다. 낙방이 계속 이어지자 코너로 몰려 작은 잡지사를 선택했다. 생계를 꾸려야 하기에 더 미룰수는 없었다. 작은 출발이지만 몸소 부딪혀 보고 싶었다. 곧 일간지 신문사로 입사했다.

그때는 기자라는 직업이 주는 어떤 환상보다는 '저널리즘'을 실천할 수 있다는 거에 흥분했던 시절이다. 어릴적 맡은 신문 냄새가 여전히 따라 다녔다. 국민의 여론을 대변하고 잘못된 권력을 비판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벅차올랐다. 이것 때문에 일반 회사를를 선택하지 않았고 기자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리는 편집권, 시간이 지날수록 더 과감해지는 자본주의와 결탁하는 수많은 기사들. '빨리 빨리'와 '남들보다 더 잘살아야 된다'는 한국인 특유의 문화는 기자 문화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속보도 빨리, 특종도 빨리, 더 중요한 것은 돈이 되는 기사도 다른 언론매체에 물 먹어서는 안됐다. 기자생활 초창기에는 남들이 안 쓰는 기사를 쓰는게 중요하다고 배웠다면, 후반으로 갈 수록 남들이 다하는데 너는 왜 놓쳤냐는 야단이 더 많아졌다.


내 꺼 쓰랴, 대세를 따르는 기사 쓰랴 허덕이는 날들이 이어졌다. 단독, 특종은 기본이고 어느 기업에서 주는 광고성 기사도 남들 받을 때 받아야 했다. 특종에서 물먹는 것보다 이 기사를 놓치면 회사에 큰 손해를 끼치기 때문에 더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어떤 비판 기사는 포털에 나가서 몇 시간 안되어 삭제되기도 했다.


데스크들은 기자의 자존심을 눈치보면서 삭제 지시를 조심히 내리곤 했었다. 시간이 더 지나자 그런 것도 없이 직견탄을 날리기 일쑤였다. 예전에는 "미안한데 말이야. 우리 언론사랑 좋은 관계가 좀 있나봐. 그래서 그런데..."라는 말을 서두에 붙였다면 이제는 "너는 눈치도 없냐"는 식의 비아냥 섞인 말들이 더 쉽게 들렸다.

40여년 동안 기자로 활동한 한 선배는 이런 현실을 두고 "이제 기자는 없어지고 있다. 멸종위기"이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공채로 야침차게 언론사의 문턱을 넘은 후배들도 "선배, 우리는 기자인데 왜 기업의 홍보팀하고 친하게 지내야 하는 거죠?"하며 따지듯 묻고는 사표를 던지는 일이 계속 생겼다. 후배의 매서운 눈빛과 파르르 떨던 입술들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나는 그럴싸한 대답을 하지 못한채 마음 속으로만 "이런 문화를 바꿀 수 없는 능력없는 선배라서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더 못살아졌다. 정보=돈이었기에 취재원 관리도 철저히 해야 했고, 놓쳐서는 안되는 기사들, 매일 수십개씩 쏟아지는 기업의 보도자료를 처리하면서 늘 파김치가 됐다. 경영회계를 전공하고 사교성이 좋다(?)는 내부 평가에 의해 기업 기사를 주로 썼다. 일에 과중독된 '번아웃'상태인지도 모르고 "나는 왜 이렇게 체력이 약하지? 엄마는 왜 날 이렇게 낳은거야?"하면서 내탓, 부모탓, 조상탓까지 했다. "더 강하게! 더 빠르게! 더 기업과 친하게!" 이것이 슬로건이었고 보이지 않는 채찍질을 해왔다.


그러다 나는 달리는 말에서 갑자기 뚝 떨어졌다.


건강상의 이유였다. 코로나가 막 닥치고 있었고 이에 대한 여파로 자동차 수출길이 막혔다는 보도를 준비던 중이었다.


한때 가슴을 불태웠던 저널리즘은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미 무늬만 기자인 '좀비 기자'가 된지 꽤 오래 되었다. 여기에 개인적인 건강문제까지 합쳐지니 더 버필 힘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정은 들었지만 선한 영향력을 주고 받을 수 없게 된 오래된 남자친구를 정리하듯 이별을 택했다. 후련치 않은 선택. 시원섭섭한 감정. 내 안의 어느 일부분이 떨어져 나가는듯한 상실감. 그것은 저널리즘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분명히 이별을 했는데 "저 여기 있어요"하면서 불쑥불쑥 나타났다. 별일없이 걷는 중이었는데. 도서관에 그동안 못 읽은 책을 보러 온 건데. 너 왜 아직도 거기 있어? 물어봤지만 대답이 없었다.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의 더미 속에서 멍하게 미국 드라마를 봤다. '10대부터 40대까지 이어진 우리의 우정' 여기까지 좋았다. 재미있어서 보다보니 드라마의 배경이 방송기자와 편집기자다. 호기심이 전혀 없는 직업인 하필 기자들의 우정. 그것도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라니. 골라도 이런 걸 고른다. 그만 볼까 갈등하던 찰나 주인공이 내뱉은 대사가 무릎을 치게 했다.


"저널리즘은 삶의 한 방식이야."


기자로 살면서 사생활에 관련된 것은 언제나 뒤로 미루거나 무시했다. 제대로 된 취미를 갖는다는 것은 부담 그 자체였다. 시간을 투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일이 중요했다. 젊은 나이에 일만 하고 제대로 삶을 누린것 같지가 않아 못내 아쉬웠던 갈증이 저 대사 한마디로 어느 정도 해소됐다. 거짓말 처럼.


변하고 있는 언론문화에 적응해야 하는데 저널리즘이 늘 걸림돌이 됐다. 돈 얘기를 잘하는 선후배들을 보면 그게 기자냐 하면서 화를 내다가도 은근 부러웠다. 그들은 현실에 잘 적응하고 있는데 나만 뒤쳐지는 것만 같았다. 저것만 없으면 나도 자본주의의 기자에 걸맞는 기사를 쓰면서 괴로워하지 않고 동시에 승진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데 하고 후회도 했다. 나는 왜 이렇게 촌스럽게 다 낡아빠진 저널리즘 타령을 하면서 살고 있을까. 게다가 이 존재는 왜 떠나지도 않을까.


고작 미드 대사 한마디에 큰 위로를 받다니. 코메디 같은 일이다. 기자를 관둔 뒤에도 자꾸만 말을 걸어오는 가슴 속 존재가 방긋 웃고 있었다. "구박 좀 그만하셔요" 하면서.


그렇다. 저널리즘은 너무 거창한 아젠다가 아니다. 우리의 평범한 삶의 방식 중 하나다. 더 트렌디하게 말하자면 '라이프 스타일'이다.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정의에 무겁기도 하고 어렵기도 한 저널리즘이 가벼운 옷을 입은듯 하다.


내가 내린 저널리즘의 정의는 '나와 우리 모두가 정의롭게, 공평하게 더 잘 살기 위한 방법 중 하나'이다. 어떤 정책도 모두를 위한 것은 없다. 그렇다고 주장한다면 단연컨데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늘과 양지를 인정하고 그에 따른 대책을 마련하는 것에 보탬이 되는 행동. 한쪽만 배부른 상태가 아닌 고생한 여러명에게도 합당한 댓가를 주고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들. 이것은 생존이자 라이프 스타일인 것이다. 저널리즘이 없다면 약자는 더 배고프고 더 억울해진다.


운동하고 걷고 책 읽고 음악듣고. 간만에 이런 여유를 즐기던 와중에도 저널리즘은 내 삶의 라이프 스타일로 자리잡은채 꿈틀댄다. 애써 잊으려 했지만 이제는 당당해진 존재. 더 커진 존재.


입이 심심해서 먹는 스낵같은 미드따위에 이런 깨달음을 얻었냐고 반문할 수 있다. 충분히 이해된다. 내가 생각해도 웃기는 일이다. 어떤 변명대신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같이 얘기해봐요."


나는 그 저널리즘을 시민들과 공유하는 꿈을 꾸고 있다.

미디어 중독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시민들에게 제대로 된 미디어의 현실과 이해를 돕는 교육에 나서려 한다. 특히 초중고등학교 등 스마트폰을 처음 받아 한참 쓰고 있는 10대 청소년들에게 책임감을 갖고 올바르게 컨트롤 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고 싶다.


미디어를 과잉 생산하는데 한 몫했던 내가 그럴 자격이 없겠지만 빚갚는 심정으로 임하려 한다. 그간 쌓은 경력이 사회에 조그만한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떤 선생님보다 미디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잘 알기에.


올바른 미디어 사용법을 교육하는 행위를 세상 사람들은 '미디어 리터러시'라고 부른다. 진짜 미디어에 대해, 진짜 뉴스에 대해 알려주고 스스로 이익이 되는 정보를 가려내는 방법들을 교육하는 행위다.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미디어 중독(=스마트폰 중독) 폐해와 가짜뉴스의 홍수, 너무 많은 정보에 허덕이고 있는 아동·청소년, 학부모, 교사, 성인, 노인 등 전 연령층이 겪고 있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는데 미약한 손이나마 보태려 한다.


핀란드 등 IT 강대국들은 IT 기술 발전과 함께 디지털 및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같이 진행해 왔다. 가장 먼저 움직인 나라가 핀란드, 영국이다. 이들은 1960년대부터 시민을 대상으로 비판, 주체성 등을 기르는 리터러시 교육에 힘써왔다. 2000년 전후 부터는 미디어 전문가인 기자가 미디어 교사로 본격적으로 활동한다. 언론사도 함께 나서면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에 앞장서고 있다.


IT기술은 인류에게 상상 그 이상의 편리함을 주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중독 및 폭력성, 성범죄 및 마약, 개인정보 유출 등 많은 부작용이 뒤따른다. 이를 먼저 자각한 핀란드, 영국뿐 아니라 수많은 유럽 국가들과 캐나다, 미국 등 북미 국가들은 학교에서 미디어를 공식 과목으로 채택하는 등 정부가 나서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IT기술 발전과 미디어 리터러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짝꿍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최근에서야 공론화가 되기 시작했다. 코로나19로 비대면 온라인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스마트폰 중독, 디지털 성범죄, 사이버렉카, 사이버블링 등 부작용이 심각하다는 보도가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여론이 이제서야 모아지고 있다.


현정부도 디지털 리터러시가 학교 현장에 꼭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교육부와 과기부에 관련 예산을 늘려 보다 효과적인 교육에 나선다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를 가르키는 IT강국이라는 명예로운 대명사에 비하면 정책, 여론, 실행 등 여러면에서 늦어도 너무 늦었다.


하지만 해법은 있을 것이다. 정부와 지자체, 학교 등 공공부문의 노력과 기자 등 미디어 전문가가 힘을 보탠다면 해법에 더 가까이 가지 않을까. 그 속에 작은 힘이 뻗칠 수 있길 바래본다. 경력보유여성기자로서 더할나위 없는 뿌듯함, 그것이 목표다.


이 글을 쓰는 나는 기자로 살았던 세월보다 지금이 더 가슴이 뛴다. 설레인다. 곁에 있는 모든 시민들이 취재원이자 인터뷰이들이다.


나는 기자를 관두고 진짜 기자가 되었다. 앞으로 이 블로그에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현장과 시민들의 이야기를 생생히 기록하고자 한다. IT강국인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모든 시민들의 진짜 행복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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