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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봄 Jan 12. 2024

광풍狂風


바람이 불었다.

마을을 어슬렁거렸고 들판을 종일 쏘다녔다. 꽃나무에 머물러 꽃바람이라 불렸고 골짜기를 지나칠 때면 산들바람이라고도 불렀다. 머무는 자리가 그 바람의 이름이었다. 이름값을 한다고 바람은 이름처럼 불었다. 툇마루에 펼쳐놓은 책장을 팔랑팔랑 넘길 때는 영락없는 까까머리 학생이었다.

호기심으로 불었고 콩닥거리는 심장으로

뛰었다. 진달래꽃 한아름 품에 안고는 발그레 얼굴 붉히며 불었다.

구름을 몰고 와 비를 뿌렸다.

구름이 비가 되었고 이내 흩뿌려진 비가 다시 구름이 되었다. 굳이 서로를 나눌 수 없어 하나가 되었을 때 서로의 가슴팍을 뜨겁게 파고들었다. 雲雨의 情이었다. 떼어낼 수 없는 사랑이었다. 바람은 향긋했고 여인의 살냄새로 불었다. 빨래터 아낙들의 치맛자락을 몰래 들추며 불었다.

여름날의 광풍으로 불었다.

잔뜩 가문 흙마당을 헤집어 놓았다. 대각대각 말라가던 빨간 고추를 멍석째 까불어놓고 달아났다. 뽀얗게 먼지가 일었고 지켜보던 사내놈에게서 기어코 욕지거리 몇 됫박을 뒤집어썼다. 쩍쩍 갈라진 논바닥 사이를 망나니처럼 뛰어놀았다. 뜨거웠고 사나웠다. 거칠었고 야단스러웠다. 머무는 자리가 이름이 된다던 바람은 고슴도치 등짝에라도 앉았다던가. 뾰족뾰족 가시 돋친 바람이 불었다.

진달래꽃 다 지도록 멀뚱멀뚱 바람 끝에 매달린 분냄새에만 코를 벌름거렸을까. 봄바람이 불었는데, 꽃순이의 젖가슴이 봉긋 꽃처럼 솟았는데, 주변머리 없는 사내놈은 새벽이 훤하도록 멍석 떼기만 물어뜯었는지도 모른다. 배알이 뒤틀리고 부아가 치밀어 울그락푸르락 못된 송아지 엉덩이 뿔만 키웠을 터였다. 그 마음을 몰라준다고 애먼 호박에 말뚝만 박아 심통을 부렸다.

애먼 바람이 날뛰어 불었다. 사내놈 사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졸던 바람이 졸지에 미친바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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