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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봄 Jan 19. 2024

알람이 울었다


알람이 요란스럽게 울었고 기차는 기적을 길게 울리더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든 게 잘 짜 맞춰진 톱니바퀴처럼 하나로 움직였다. 예정된 시간이었다. 오래전부터 계획된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천체와도 같았다. 태양의 중력에 사로잡힌 행성은 그 크기와 거리에 상관없이 정해진 길을 따라 움직여야만 한다. 어쩌다 소행성이 떨어져 모든 생명을 앗아간다고 해도 억겁의 시간을 그랬던 것처럼 지구라는 행성은 태양의 인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45억 년의 시간을 그렇게 달려왔듯 앞으로도 그만큼의 시간을 태양을 바라보며 공전해야만 한다. 이제 겨우 반환점에 가까워졌다고 한다. 질기고도 단단히 묶인 정해진 궤도다.

우주의 시간은 짐작조차 어렵고 그 크기는 상상조차 불가능하게 광대하지만, 따지고 보면 한낱 먼지에 불과한 내가 존재함으로써 존재의 의미가 있다. 138억 년이라 우주의 시간조차 나의 경외심에 기댄 시간일 뿐이다. 우러러 바라보는 시선이 없다면 수천억 개의 은하수가 아름다울 이유도 없다. 바위를 쪼아 별을 새기고 우러러 바라보던 숱한 시선이 있고서야 광대무변의 우주도 비로소 그 의미를 찾게 마련이다. 그러니 하찮은 마음 한 조각일지언정 하찮지 않은 이유다. 그 마음이 애가 탔다. 조바심이 나서 안달을 했다. 지난가을 이런저런 이유로 겨울시간을 묶어두었었다. 겨울잠에 드는 동물처럼 모든 것 미뤄놓고 동면 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통보를 받았다.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멈췄던 나의  시간이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움직인다는 말이다.

같은 공간을 사는 사람이라도 같은 시간을 나누지는 않는다. 각자 시간 하나씩을 몸뚱이에 묶고 그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며 산다. 가까운 사람은 각자의 시간이 겹치는 접점만큼 함께 머물러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거다. 어긋난 인연은 결국 접점이 없는 시간을 살게 되는 인연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같은 터를 깔고 앉았던 사람이 얼마나 많았을까 짐작도 어렵다. 땅을 파면 켜켜이 쌓인 시간이 단층처럼 얼굴을 내민다. 살다 가고, 살다 가고, 지금은 덧쌓인 그 자리에 내가 있다. 겨우내 멈췄던 그 시간이 다시 움직인다. 움직이지 않아 조금은 덜 멀어졌던 각자의  시간들과 다시 더 멀어진다. 너무 멀어져 시야에서 벗어나지나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애를 태웠다. 갈래길에 멈춰 하염없이 바라보던 너는 별처럼 아름다웠다 주절거리는 게 좋았다. 잠자듯 멈춘 계절을 사는 큰 행복이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기차인지 행선지를 모른다. 침목 하나를 지날 때마다 덜컹덜컹 아우성치며 나는 이쪽으로 가네 소리를 치겠지만, 이내 목은 쉬고 모습은 한 점으로 멀어질 터다. 하기는 겨우내 평행선으로도 만나지 못한 철길이 봄이 되었다고 느닷없이 같은 플랫폼에 들어서지는 않을 일이다. 하다못해 눈도 없고 살갗도 없는 식물도 내재된 생체시계로 세상을 보고 느낀다. 밤낮의 길이를 알아 꽃눈을 키우고 변화된 온도를 감지해 물을 빨아올린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모든 게 정해진 시간과 길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종일 세상을 보고 듣는 나는 정작 때를 모르고 길도 모른다. 어디로 갈까? 언제 갈까? 주저하고 망설인다. 갈팡질팡 헤매다가 길가에 주저앉아 탄식을 한다. 그러니 오늘 듣는 기적소리가 있다면 자리를 털고 일어서서 손을 흔드는 게 옳다. 뿌웅 멀어지는 기적소리에 손이라도 흔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겠다. 알람이 울고 느리지만 다시 기차가 움직였을 때 나는 서운함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을 목전에 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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