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합니다

#12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by 이봄

가끔은 멍하니 허공 바라보면서 생각하게 됩니다. 돌아보면 아쉬운 시간이 켜켜이 앙금으로 쌓였습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고,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고 하듯, 지금의 나는 살아온 세월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고 이렇게 살았다네 하면서 떠들 수가 없습니다. 그저 침묵의 진중함에 기대어 은근슬쩍 묻어가는 형국입니다.

떠들 것이 없습니다. 입 다물고 살면 그만이야 하면서 살았습니다. 떠들 것 없으니 다물면 그만이고, 떠들지 않으면 주목받을 일 없어서 그냥저냥 세월을 보내기에 안성맞춤입니다.

나대는 돌이 정을 맞는다고 소리도 흔적도 없이 살면 그만이다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을 알게 됐습니다. 엉망진창 앞뒤도 없이 마음이 뒤섞이고, 때때로 예정에도 없는 소낙비가 내립니다. 돌풍은 나무를 꺾고, 풀뿌리를 뽑았습니다. 성난 바람의 아가리는 낮과 밤을 나누고, 절대 선과 절대 악으로 나뉘어 헐뜯고 험담하는 회오리였습니다. 그가 점점 좋아질수록 태풍이 불고, 땅은 갈라져 불을 뿜었습니다. 마음이 아립니다.

생각의 늪에서 허우적입니다. 조금이라도 잘난 모습이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잘난 것 없어 벌어지는 이전투구입니다. 시간을 더해 자라나는 달덩이 하나 가슴에 있습니다. 보름으로 달려가는 그는 아름답고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곱게 자라나는 달빛이 좋을수록 그림자 하나 덩그랗게 앞세운 남자는 심란합니다.

흔한 말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 했다지만 이름을 남길 위인이 못 됨을 압니다. 포기하면 더는 갈등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려니 하면서 한 발 뒷전으로 물러나면 그만입니다. 그러려고 했습니다. 삐죽삐죽 돋아나는 욕심들 망설임 없이 밟으며 살고자 했습니다.

면벽수도 득도의 거창함은 애초에 없습니다. 세상의 복판에서 부침을 겪으며 살았습니다. 좋았던 시간이 있는 만큼 그 그림자도 깊고 짙었습니다. 풍덩 소리 내어 뛰어들면 다시는 헤어나오질 못할 심연이 거기에 있었을 때, 아슬아슬 위태로운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그만 하면 됐다"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질끈 두 눈을 감았다고 할까요. 그랬습니다. 세상으로 열린 두 귀를 닫고, 끊임없이 세상을 기웃거리던 두 눈을 감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소용도 없고 부질도 없었습니다. 단단히 걸어 잠근 빗장은 와락 부서지고, 부서진 틈바구니로 너라는 홀씨 하나 날아들더니 말을 합니다. 닫은 귀 열고 감은 눈 뜨라고 합니다. 게다가 앙다문 입 크게 벌려 말을 하라고 합니다.

거부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귀를 열고 눈을 떴을 때 다시 세상은 시끄럽고 마음은 복잡합니다. 끝끝내 피하고 싶었던 아우성입니다.

살가죽에 찍힌 도장 하나로 평가되는 소가 있듯, 내 등짝에는 어떤 도장 찍힐지 궁금합니다. 최고는 아니어도 중간쯤은 되었으면 좋겠는데 자신이 없습니다. 그를 알고부터 자라나는 욕심은 한 여름의 오이만 같은데 남자는 휴우 한숨을 뱉었습니다. 멋진 남자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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