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달로 떴으면...
말 몇 마디 나누다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갑작스레 말이 끊기고 미처 토해내지 못한 말이 목구멍에 걸려 왁자지껄 시끄러울 때 비로서 먹은 음식은 체하고, 가슴엔 돌덩이 하나 날아들어 묵직하게 나를 가라앉게 한다. 버둥거려도 발끝에 바닥은 닿지 않았다. 물은 깊어 이내 코가 잠길 판이었다. 가슴을 짓누르는 수압에 심장은 발작을 일으키듯 신경질적으로 뛰었다. 신경질이 맞다. 닿지 않는 바닥과 콧구멍을 집어삼키려는 물은 늘 신경질적으로 출렁거렸다.
말이란 때로 잔잔한 수면의 호수도 되었다가 때로는 거친 풍랑으로 뒤집어지는 바다를 이루기도 했다. 세 치 혀로 꾸며지는 세상은 봄날의 꽃밭이기도 했고, 눈보라 몰아치는 광야의 삭풍이기도 했다. 꿈을 이야기할 때는 떠오르는 태양과 푸른 하늘빛을 기웃거리게 마련이었고, 절망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는 죽음이라던가 눈물이이라던가 하는 암울의 근처를 서성이게 했다. 말이 만드는 세상은 실체도 없이 사람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동아줄로 힘이 대단히 셌다. 그래, 말이란 그랬다. 사람의 꿈을 이야기하고 사람의 절망을 이야기할 때도 결국은 말이란 놈을 빌어다 나를 얘기하고 설명해야만 했다. 때로는 거칠게 가시도 돋고 끝은 뾰족해서 날카로왔다. 심장을 후벼파고 팔 다리에 커다란 칼자국 하나 남기기에 충분했다. 때로는 복사꽃 어지럽게 향기 분분하고, 꽃분홍 달짝지근해서 얼굴을 붉혀만했지만 말이란 늘 바닥에 닿지 않는 불안함을 끌어안고 살았다. 어디까지 나아가고 어디서 멈춰야하는 지를 고민해야만 했다. 분명 내게서 비롯된 말이지만 결국 말이란 내것이 아니어서 그렇다. 너에게 향한 나의 말은 내 입을 떠나는 순간 이미 주인을 바꿔 너에게 닿는다. 받아들이는 너의 귀와 너의 가슴에 어떤 모습으로 피어날까?,는 온전히 듣는 너의 몫이기도 했다. 말하는 나와 듣는 너의 마음에 따라 말이란 비수가 되기도 했고 향기로운 백합화가 되기도 했다. 마음 씀이 너와 나의 중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저울질을 했다.
그런다고 했다. 말은 주인을 닮고 사람은 말을 닮는다고 했다. 어디서부터 나의 말은 꼬이고, 어디서부터 향기를 잃어 서걱이는 억새가 되었을까? 되짚어 올라갈 세월은 너무도 멀고, 쏟아낸 말은 산을 이루고 있었다. 말이란 놈이 깨 한 톨의 몸뚱이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말은 산이 되고 바다에 엎드린 섬 하나쯤은 너끈이 만들고도 남았다. 귀는 팔랑거리고 눈은 침침했는가? 세상을 제대로 듣지 못했고 길을 올바로 걷지 못했다. 말은 늘 달콤하고 향기로왔다. 세상은 철마다 다른 꽃들이 피어났고, 바람은 꽃향기를 퍼날라 늘 향기롭게 불었다. 그렇게 믿었고 그렇다고 했다. 비릿하게 불어가는 바닷바람에선 섬마다 피어난 들꽃의 향기가 베어들었다. 향기로운 말이 좋아서 코를 킁킁거리기 일수였는데 언제부턴가 향기는 사라지고 악취가 묻어났다. 말이 썩었다. 세상은 봄날의 달큰함은 사라지고, 늦가을의 버석이는 낙엽과 겨울의 모진 바람만 떼로 불어갔다. 송곳니 들어낸 바람은 사납게 불었다. 마른 억새는 비수처럼 휘적여서 손을 베이고 말았다.
알 수가 없다. 양날의 칼 손에 쥐고서 나는 걸음을 멈췄다. 새콩 줄기손 더듬더듬 허공을 더듬어 나뭇가지를 붙들고, 참취나물 튼실한 줄기를 붙들어 하늘을 기어올랐다. 새콩은 나뭇가지를 기대어 단단히 줄기를 꼬고 올라야만 했다. 햇살 한 줌 걸린 나무 꼭대기에 기어올라야만 자주빛 꽃송이 주렁주렁 피워내고, 콩꼬투리를 맺을 거라서 새콩 줄기가 꼬이는 건 세대를 잇는 몸부림이기도 했다. 너는 꼬여 삶의 절정을 맞을 거였다. 꼬여 좋거나, 꼬여 괴롭거나 여름의 열기 머리에 이고 땀방울을 흘렸다.
다듬어지고 세련되지 못한 주인이라 장미꽃 곱다거나 후리지아꽃 향기롭다거나를 바라지는 않았다. 어쩌면 덩굴 가득 가시가 돋아도 떼지어 향기로운 찔레꽃으로 피었으면 했다. 말은 늘 조심스러웠다. 어디로 날아가 움을 틔운다해도 들꽃 하나쯤 되거라 했는데, 말들은 허공을 떠돌다 꼬인 실타레로 어느 험한 골목길을 굴러다니는 게 분명했다. 불어오는 바람엔 뒷골목의 음침함이 묻어있었다. 석 달 열흘 뒤섞인 곰팡내가 진동을 한다. 어디를 자르고 어디서부터 풀어내야 꼬인 실타레 풀 수 있을까? 삼복더위 맹렬하게 햇볕을 쏟아낼 때 나는 가위 손에 들고서 주저주저 길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