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다행이다

겨울이 깊다는 풍문이 돌았다

by 이봄

살다 보면 참 다행이다 싶은 순간들이 많기도 하다. 불 꺼진 빈 방문을 열 때 어둠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어서 다행이고, 불어 터진 라면 한 사발 마주하고 앉았을 때 꼬르륵꼬르륵 아우성치는 주림이 있어 다행이다. 생각해 보라. 등짝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외로움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면 얼마나 서글플 것인가? 사위를 덮어버린 어둠이 있어 그 품에 숨을 수 있으니 다행이고, 산해진미 기름진 음식이야 꿈에서라도 사치일 터인데 제 어찌 알고 불어 터진 라면 사발 앞에서라도 아우성치는 위장은 또 얼마나 대견스러운가?

초벌 잠에 저녁이 까무룩 졸더니만 잠은 꽁무니를 뺐다. 자정이 지나고서 틀어놓은 티비는 장중한 클래식으로 목청을 돋우고 있었다. 어차피 트로트 짧은 박자도 귀를 사로잡지 못할 시간인데 무슨 개발에 편자랴. 셀죽 토라진 마음은 허위허위 허공을 휘젓고야 만다. 그러거나 말거나 티비에선 여전히 오캐스트라의 묵직한 연주가 이어진다. 지붕 위 닭 쳐다보듯 데면데면 어색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것도 다행이다 싶다. 서리서리 접어둔 겨울밤 고이 펼쳐 맞을 임도 없는데, 말이 끊겨 적막만 들어찬 골방에서 숨소리만 씩 씩 새벽을 가른다면 그만한 궁상이 또 있을까? 각자의 방식으로 새벽을 깨울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하게 된다. 말똥말똥 멀뚱멀뚱 달아난 잠의 흔적을 좇아 훤히 밝아오는 창가에 서서 청승을 떤다. 불면의 밤은 아침을 마중하고서도 한참을 더 거기에 서 있었다.

때로 너무 빠르다 싶다가도 뭔 놈의 시간이 이렇게 느려 터지지 하게도 된다. 지금이 그렇다. 낮 밤이 바뀐 생활을 일 년 넘게 하다가 그만둔 날, 몇몇 하고 싶은 것들을 꼽았다. 울릉도를 가고 싶었고, 오랫동안 보지 못한 딸을 보러 가야지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마무리짓지 못한 치과치료를 끝내기로 했다. 제일 우선한 치료를 위해 가까운 치과를 알아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치료를 시작했다.

늙어서 그런가? 생각보다 회복이 늦어지고 더디기만 하다. 이렇게 저렇게 계획했던 일정은 하나씩 둘씩 뒤로 미뤄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창살 없는 감옥살이를 하는 요즘이다. 할 일 없는 하루는 얼마나 느린지 모른다. 황소걸음 느릿하게 가다 말다를 반복하고, 팔자에도 없는 산모처럼 먹고 자고, 다시 일어나 밥을 먹는다. 중천에 뜬 해가 재촉을 하고서야 겨우 일어나 주린 배를 달래는 날들이 일상으로 자리를 잡고, 예약된 일정을 확인하다가 '제기랄, 뭔 시간이 이렇게 느려터진다냐?' 구시렁거리고야 만다.

"시간이 뭔 죄야!"

다 조바심에 안달을 하는 내가 문제다. 하고 싶은 것들 줄을 세웠으니 더딘 마무리가 안타까웠을 뿐이지. 그러다가 또 생각하게 된다. 시간은 조바심에 채근을 하든 말든 흘러가고 있었고, 더디기만 한 내 몸뚱이도 알게 모르게 제자리를 찾고 있다는 거. 참 다행이다 하게 된다. 눈도 없는 겨울이지만 겨울은 깊어만 간다. 깊어지고 단단히 여무는 겨울은 봄을 그만큼 당기는 중이다. 머지않아 아지랑이 몽롱하게 피어나는 봄이 온다는 얘기다. 참 다행이다 하게 된다. 봄날이라니? 셀레는 말이다. 느긋하고 게으르게 봄을 기다린다. 그 기다림의 사이사이엔 치료도 갈무리될 터이고, 허락된 여행도 분명 있을 테다. 게다가 그와 나눌 맛있는 밥 한 끼도 반기겠지. 그래 그렇게 다독이는 마음, 위로하는 몸짓이 째깍이며 간다.


"참 다행이다. 겨울이 깊다는 풍문도 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