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유치해도 이 겨울이 따뜻합니다

by 이봄

자고 일어나면 툇마루 꼭대기까지 눈이 쌓이곤 했습니다. 마루의 끝이 어디고 마당의 시작이 어디인지 가늠할 수도 없게 눈이 쌓일라치면 세상은 온통 은빛 겨울로 반짝였습니다. 가만가만 귀 기울이면 뚝 뚝.... 솔가지 부서지는 소리로 정적을 깨우기도 했고, 논두렁 풀포기 밑 움푹 파인 곳엔 배고픈 산새들 짹짹 울기도 했습니다. 파란 하늘과 하얀 눈밭 사이로 시린 바람이 불었습니다. 언 골짜기 사이로 불어 가는 바람은 눈보라 뽀얗게 일으키며 달아났는데 뭐가 그리 좋은지 동네 아이들은 빨갛게 언 두 뺨으로 방긋 웃었습니다. 썰매 하나씩 옆구리에 끼고서 해 걸음이 되어서야 겨우 집으로 향했지요. 옹기종기 기대 선 굴뚝마다 뭉게뭉게 밥 짓는 연기 매콤에게 피어나는 시간입니다.

겨울은 그랬습니다. 미세먼지도 없었고, 이렇듯 야박한 겨울도 없었습니다. 처마마다 한 발쯤 되는 고드름 마당에 닿을 지경이었고, 콧물 훌쩍이게 춥던 바람은 덤으로 등등하기도 했습니다. 불꽃 타닥이는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고무레로 끌어낸 알불에 밤도 몇 톨 구웠습니다. 시리게 춥고, 아리게 고소한 겨울이 동치미 국수처럼 새콤 시원하게 여물었습니다. 아주 오래된 겨울의 기억은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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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북숭이 바둑이와 철 모르는 아이들만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쉰내 나게 나이를 먹어도 마음은 매 한 가지입니다. 꾸물꾸물 먹구름이 모여들면 마음은 속절없이 콩닥이고야 말지요. 늘 반가운 마음입니다. 까까머리였을 때도 그랬고, 귀밑머리 백발로 휘날리는 오늘도 그렇습니다. 찬바람 쌩하게 불어 가면 기다리게 됩니다.

제대로 된 방한복도 없던 날에도 소담스레 쌓이면 종일 뒹굴고 뛰놀았습니다. 천둥벌거숭이가 따로 없었지요.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목만 두루미처럼 늘어나고야 말았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야박한 겨울일까요. 춥지 않아 다행이다 싶다가도 마음 한편엔 손사래 치게 되네요.

"아니지, 이건 정말 아니지. 겨울이면 살을 에는 칼바람 불어야 하고, 무릎까지 푹푹 빠지게 눈이 내려야 그게 겨울인 거야...."

정말입니다. 겨울이면 겨울답게 함박눈 펑펑 한 번쯤은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강아지도 미친 듯이 뛰놀겠지요. 꽁꽁 언 손 호호 불어가며 눈사람도 하나쯤 만들 터입니다. 솔방울 두 개, 말라버린 길쭉한 애호박 하나, 거기에다 붉은 고추도 하나 손에 들고서 그럴싸한 조각가라도 된 듯, 굴리고 다듬어 만들어낸 눈사람 하나면 절로 미소 짓게 됩니다. 그런 겨울을 기다렸습니다. 아직도 풋내 나는 가슴은 눈을 기다립니다.

한참 눈 얘기를 하다가 그와 약속 하나 잡았습니다. 뜬금없는 약속이고, 치기 어린 약속입니다. 뭐 어때요? 유치해서 행복할 수 있다면 강보에 싸인 젖먹이의 유치여도 마냥 좋겠습니다.

"있잖아 우리, 눈 내리면 무조건 커피 마시러 가자. 어때?"

"뭐야? 유치하게.... 음, 그것도 나쁘지 않겠는 걸. 그래, 그러자."

벌써 며칠이 지났고 눈이 내린다는 일기예보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유효한 그 약속이 있어 하늘을 보게 되네요. 콩닥콩닥 가슴 뛰는 날들이 겨우내 이어질 것만 같습니다. 아직 겨울은 충분히 남았고, 너른 창가에 앉아 내리는 눈 바라보며 마실 커피는 향기를 더하고 있습니다. 기다림이 행복한 날들이 소담스레 쌓이네요. 함박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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