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찾아와 말도 없이 사라졌다. 아니구나. 떠나는 걸음은 요란하고 시끄러웠다. 먹구름 뭉게뭉게 하늘을 점령하고 늘어선 가로수는 미친 듯이 휘청였다. 열린 창틀은 소달구지 자갈길을 가듯 덜컹거렸다. 한낮의 고요는 무참히 짓밟히고 호수의 수면은 덩달아 파문으로 일렁거렸다. 자정의 침묵을 깨고 찾아든 불청객은 그렇게 천둥이며 벼락으로 휘번득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기세 등등한 객의 기세에 눌려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던 나는 그저 범 앞에 꼬리 내린 누렁이가 됐다 해야겠지. 사면초가 길을 잃었다. 퇴로는 이미 막혔는데 나아갈 바를 모르는 꼴이라니... 하늘은 이미 노랗고 진창으로 변한 길은 발목이 쑥쑥 빠져드는 늪에 지나지 않았다.
"제기랄! 죽어라, 죽어라 하는구나!"
가뜩이나 되는 일 하나 없는데 몸뚱이마저 죽어라 몸부림을 치는구나 했다.누구를 탓하고 원망할까? 모두가 자업자득임을 모르지 않는데 그래도 하늘을 향해 주먹질이라도 해야 그나마 숨을 쉬겠다 싶은 심정이랄까. 잘 되면 내 탓이요, 안 되면 조상 탓이라고 못된 심사가 뱀의 똬리로 앉았다. 통증으로 발악하는 시간은 새벽을 깨워 날뛰게 했다. 고삐 풀린 망아지 한 마리 천 리를 달려 절망의 강에 다다랐을 때 천둥이 쳤다.
이구동성으로 하는 위로의 말이
"그만하길 다행이다 해야지"한다.
흔히들 하는 얘기 중에 '불행 중 다행이다'라는 말처럼 좀 비싼 건강검진받았다고 생각하라는 말이다.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다. 더 심각한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었는데 다리로 가는 동맥 하나가 탈이 났다. 무탈함만 한 일이 있겠냐만 탈 없이 건너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 많고 많은 탈 중에 그래도 허리를 묶든 발목을 감싸든 간에 막을 수 있는 탈이라면 그나마 다행인 거다. 탈이 나서 다행이다 얘기하는 것이 씁쓸하다만 엎질러진 물이니 어쩔 수가 없다. 탈이 났기에 가래로도 막을 수 없는 일을 호미로 막는다고 생각하면 이만한 전화위복도 없을 듯싶다.
당황스러움이 놀란 가슴을 만들었다. 솥뚜껑만 보아도 심장은 덜컹 내려앉고 사지는 사시나무 떨듯 했다. 후미진 자락에선 훌쩍훌쩍 눈물 훔치는 소리가 났다. 입버릇처럼 달고 살던 말은 그저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다. 하긴 어디 그게 확신의 말이던가? 그저 막연한 바람이고 나약함의 허풍선이었을 뿐 아무것도 아니다.
"가려거든 그저 한방에 조용히 갔으면 좋겠다"라고 떠들었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그 허무한 말에 세상 온갖 나태하고 나약한 것들을 위한 면죄부를 매달았다. 막상 응급차 앵앵거리고 경광등 번쩍거리니 마음이 복잡했다.
불행 중 다행이야.... 말 하나 입에 달고서 살아야겠다. 혼자 산다고 정말 혼자인 삶은 아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깨어난 놈도 아니고 첩첩산중 도를 닦는 수도승도 아닐진대....